15. 이민족의 지배와 이스라엘의 멸망

 

15. 이민족의 지배와 이스라엘의 멸망

 

. 시대적배경과 종교적상황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기에 중동 지역의 국제정세는 신 바벨론 제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유다 왕국의 여호야김왕 때 애굽의 바로 느고Ⅱ세는 유브라데 상류 칼크미스에 진군하여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바벨론 제국은 주전 609년까지 중동 아시아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 609년 봄에 이르러 칼크미스에서 두 강대국의 결전이 있었는데, 바벨론과 애굽의 전쟁이었다. 신흥 바벨론 군을 지휘한 왕자 느부갓네살Ⅱ세는 애굽을 격파하고 애굽 접경까지 진격하여 중동 아시아 전체 지역, 소아시아,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을 수중에 넣었다.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이 죽으므로 그해 9월 느부갓네살Ⅱ세는 신 바벨론 제국 2대 왕위에 올랐다. 나보폴라살 통치 당시 왕자 느부갓네살Ⅱ세는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유능한 젊은 인재를 바벨론으로 옮겨 관직에 종사하게 했다.  

 느부갓네살Ⅱ세가 바벨론으로 돌아간 사이 유다 왕국의 여호야김왕은 어리섞게도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을 배반했는데, 느부갓네살Ⅱ세는 그의 예하 부대와 아람, 모압, 암몬의 부대를 유다로 보내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여호야김왕은 죽게된다. 여호야김왕의 아들 여호야긴은 당시 18세였는데,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느부갓네살Ⅱ세가 성에 이르렀을 때 바벨론 왕 앞에 나아가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아내들, 방백들, 용사, 기능공 등을 포함 10,000명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 때가 제2차 포로였다.  

 바벨론 군은 성전과 왕궁의 기구를 파괴하고 보물을 노획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긴왕이 출생하지 않은 땅으로 쫒겨날 것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언했다.(22:24-30) 이후 느부갓네살Ⅱ세는 요시아왕의 막내 아들 맛다니냐를 왕으로 임명하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개명했다.  

 시드기야는 판단력이 부족하고 무능했는데, 바벨론 제국을 배반할 것을 권하는 방백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등 여러 사신들이 강력히 권유하는 바람에 애굽에 의지하다가 주전 588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Ⅱ세가 다시 서쪽으로 출정하여 시리아 오론테스 강변 리블라에 본부를 두고 유다 온 성읍을 짓밟아 황폐화시켰다. 그런데 바벨론 군의 예루살렘 공략 당시 애굽의 군대가 유다를 도우러 출정했는데, 바벨론 군이 일시적으로 퇴각한 후 다시 재정비하여 주전 588년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했고, 시드기야왕은 붙잡혀 눈이 뽑히고, 쇠사슬로 결박당해 옥에서 죽고말았다. 그리고 제3차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42,360명이나 되었다.(에스라2:64, 7:66)  

 바벨론의 강제 유배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파괴, 분열, 등이 일어났으며, 이때 에돔인들이 유다 영토를 침범해 들어온 것이다.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에 대해서 하나님의 징벌을 예고했다. 그것은 그의 쌍둥이 형제 야곱에 대한 폭력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벌하시려는 이유는 첫째, 그들은 형제의 재앙을 보고 즐기는 일을 했으며, 둘째로 그들이 저질런 잘못은 남의 패망을 보고 기뻐했다. 셋째 그들은 형제의 어려움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넷째, 그들은 형제의 고난에 대하여 불구경하듯이 목격하였다. 다섯째 그들은 형제의 고난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여섯째, 그들은 어려움 중에 있는 자에게 물질을 빼앗았다. 일곱째, 그들은 도망가는 자들을 잡아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악한 일을 행했다.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의 심판에서 나아가 열국을 향하는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바벨론 제국이 점령국 백성을 타 지방으로 유배시킨 것은 앗시리아 정책을 답습한 것이었다. 앗시리아 제국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남은 백성을 혼혈하게 하여 피 점령국 씨의 정통성을 멸하려 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Ⅱ세는 이방 타민족을 유다에 이주시키지 않고 단지 포로로 잡아갔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포로된 유대인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다시 유다로 귀환할 것을 말했다.(29:5-7) 느부갓네살Ⅱ세는 유다를 바벨론 제국의 일개 주로 편입시키고,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실패로 끝난 왕족 이스마엘의 반란은 그달랴를 암살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또 한번의 유배를 떠나고 국외로 추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달리야 총독이 살해되자 그의 군사보좌관 요하난은 바벨론 제국의 보복이 자기에게로 올 것으로 생각하고 애굽으로 도망하기로 결심했는데, 군사보좌관을 따라 애굽으로 도망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많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도망치려던 백성들에게 가지 말 것을 경고했지만 “믹돌에서 수에네까지” 곧 애굽에 피난한 유대인에게 전쟁이 따라 미쳐서 그들은 큰 환란을 겪게되었다. 기록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선지자 예레미야는 돌 하나를 감추었던 다바네스 왕궁 어귀에 느부갓네살왕은 바벨론 지휘 본부 천막을 쳤다.(43:10-11)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애굽으로 내려간 유대인에게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곳 곳마다 바벨론 군과 애굽 군과의 전투에 따라 막대한 전란을 겪어야 했다.  

 신 바벨론 시대는 느부갓네살Ⅱ세에 의해 정책과 제도가 정비되었고,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날 때까지 약 70년간 이었다. 신 바벨론 제국은 초대 나보폴라살, 느부갓네살Ⅱ세, 애월-므로닥, 네르갈 사데셀, 라바시 마르둑, 나보니두스, 벨사살을 끝으로 7대 까지 이어졌다. 느부갓네살Ⅱ세는 성곽공사, , 수로, 왕국건설, 신전 등 각종 국책 공사를 단행했다. 그들은 월신 신당을 개수하고, 월신 숭배를 장려했다. .느부갓네살Ⅱ세가 죽자 바벨론의 영화는 급속히 사라졌고, 대를 이은 왕들은 왕위 찬탈과 소홀한 통치로 더 이상 예속된 나라를 지배할 수 없게되었다.  

 고레스Ⅱ세의 가문은 대대로 페르시아 남서부 엘람지방, 페르시아 만 동북쪽 인근 안산 도시 왕국의 왕이었다. 그의 조부는 고레스Ⅰ세이고 그의 아버지는 캄비세스세였다. 당시 안산 왕국은 메대 왕국에 예속되어 지배를 받았다. 고레스Ⅱ세가 안산 왕으로 즉위는 주전 559년 경이었고, 주변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웠다. 

 주전 553년 고레스왕은 종주국 메대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메대 왕국은 강대한 나라로서 티그리스 강 동북쪽 카스피안 해, 동쪽으로는 인도 접경까지, 그리고 남쪽은 페르시아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터기 동쪽 일부와 이란,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영토에 해당한다. 따라서 메대 제국으로 칭했고, 아스트야지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주전 553년 고레스Ⅱ세 통치 3, 그는 메대 제국을 침공했다. 당시 전쟁에서 고레스왕은 기세를 올렸고, 위협을 느낀 메대 군은 반란을 일으켜 아스트야지왕을 잡아 고레스왕에게 넘겨주었고 항복하고 말았다. 메대를 수중에 넣은 페르시아는 대 제국이 되었다. 단시일 내에 일개 작은 지역의 왕국이 대 제국이 된 것이다. 이에 바벨론 제국, 리디아 제국, 애굽, 헬라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한다. 신흥 페르시아 제국의 발흥에 대해서 위협을 느낀 리디아 제국 크로이소스왕은 바벨론 벨사살왕, 애굽의 바로 아마시스 및 헬라, 스파르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고레스왕의 처음 출정 목표는 소아시아 리디아 제국이었다. 주전 54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통해 소아시아 중부에서 흑해에 이르는 할리스 강을 건너 진군했으며, 리디아 제국은 수도 사데가 함락되었고, 고레스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고레스왕은 바벨론을 공략하기 전 페르시아 동쪽으로 출정하여, 인도 서부지역까지 점령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따라서 전 영토는 소 아시아에서부터 인도 서부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이었고, 그 가운데 바벨론은 독에 든 쥐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정복 전쟁 중에도 바벨론의 벨사살왕은 월신 숭배에 몰두했는데, 우그바루 장군이 바벨론에 침공하여 아무런 저지없이 성을 함락했고, 벨사살왕은 살해되어 고레스왕은 바벨론이 함락된 후 10 29일 바벨론에 입성했으며, 바벨론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송형철에 의하면, 페르시아 제국은 고레스Ⅱ세를 시작으로 13대 다리오Ⅲ세까지 이어졌으며, 유대인 포로 귀환은 고레스 황제의 포고령 이후 94년이라는 오랜기간 동안에 걸쳐서 귀환하게 된다. 1차와 2차의 귀환 사이의 연한은 80년이었고, 2차와 3차 귀환사이의 연한은 14년이었다.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헬라시대가 들어서면서 알렉산더 대왕이 등극했고, 그의 죽음 이후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크스왕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집트를 몰아내고 그 지역의 지배자로 등장했는데, 안티오크스왕은 최대한 유대인들을 배려했다. 유대 난민들의 본국 귀환과 포로들의 석방을 명령했다. 예루살렘이 경제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세금을 3년간 면제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고, 제의를 지원하기 위한 일정 금액의 보조금도 약속받았다. 이외에도 면세는 장로들의 평의회와 서기관들까지 확대되었고,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마련되었던 제단 용 땔감도 면세가 선언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유대인들에게 미쳤다. 안디옥, 알렉산드리와 같은 대도시들은 그리이스 식이었고,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왕 다리오Ⅲ세가 죽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중앙 아시아에 원정하여 영토를 계속 확장해 갔다. 알렉산더 대왕은 계속 동북지방까지 점령하여 그의 제국에 편입시켰으며, 힌두 구스산맥을 넘어 아프카니스탄을 경유하여 인도 북부 인더스 강을 건넜다. 알렉산더 대왕은 본토를 떠나 수년이 지나서 계속 전쟁을 수행했는데, 주전 323 6 10일 열병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죽게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임종 당시 수석 장군 페르디카스 장군에게 인장 반지를 주면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고, 빌립 아라다에우스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하도록 했다. 페르디카스 장군은 제국을 분할하여 다스리도록 나누었는데, 톨레미 장군은 애굽을, 안티파타 장군은 마케도니아를, 바벨론은 셀레우쿠스 장군을, 소 아시아는 안티고누스 장군이 다스리도록 총독으로 임명해주었다.  

 그런데 섭정을 하고 있던 페르디카스 장군이 살해되고 말았다. 4명의 총독 중 안티파타 총독이 섭정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총독은 안티파타의 아들 카산다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아라다에우스왕이 마케도니아 신임 총독 카산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왕이 죽고나자 권력 다툼이 생겼는데,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디아도기 전쟁이다. 이 이후에 톨레미 총독은 애굽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레바논), 구브로 섬을 장악했고, 셀레우쿠스 총독은 시리아를 장악했으며, 리시마쿠스 장군은 소아시아를 장악했고, 카산다 총독은 마케도니아와 헬라를 장악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대제사장 요한 힐카누스로 부터 7대의 안티고누스Ⅱ세까지를 말한다. 하스몬이란 이름은 시리아 왕 안티오크스Ⅳ세(그의 이름은 에피파네스) 학정에 대해서 반기를 들은 모딘 마을 제사장 맛타티아스의 조부의 이름 하스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군을 장악했으나, 안티오크스Ⅶ세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는데, 예루살렘 포위로 성안에는 기근이 심했으며 대제사장 요한 힐카누스는 안티오크스Ⅶ세에게 어린아이와 노인의 석방을 촉구했으나, 그는 불응했고, 장막절 절기 주간의 휴전을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협상이 성립되어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은 3천 탈란트를 안티오크스Ⅶ세에게 주고, 안티오크스Ⅶ세가 철수하면서 화해 동맹을 맺게된다. 

 그 이후 대제사장 요한 힐카누스는 영토 확장을 위한 원정을 하여 사마리아 성읍과 그리심 산을 정복하여 그 곳 이방 신전을 훼파했고, 요단 및 사해 동쪽 암몬 땅 메드바와 사마가 까지 진출했다. 유다 남쪽 지방 에돔 족속의 땅 이두매를 점령하고, 그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여 유대교를 받아들이게 한 후 하스모니아 왕조에 합병시켰다. 

 로마는 이태리반도의 중서부 라티움지방의 작은 마을이었다. 작은 마을이 주전 6-7세기에 발흥하여 이태리 반도뿐만 아니라 유럽,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전 역 및 애굽을 다스리는 최강자가 된 것이다.  

 이태리 반도에는 라틴족, 골족, 에트루리아족이 살고 있었는데, 에트루리아 왕국이 로마를 약 1세기동안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는 이들에 의해 개화되었고, 결국 에트루리아를 쫒아내고 만다. 주전 500년경 로마는 권력을 가진 특권 층의 일부 귀족계급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들은 왕권을 가진 파라티네 언덕, 퀴리누스 언덕, 카에리안 언덕 등 세 지역의 귀족 가문이었다. 이들 귀족 계급은 왕, 상원위원, 의회 위원이 될 수 있었고, 왕은 최고사령관, 재판장, 대사제였다.  

 로마 공화국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주전 367-266년 까지 약 1세기동안 포 강으로부터 남부 이태리 캄파니아 지방에 이르기까지 삼니움족과 싸워 이겼으며, 시스알파인 골 민족과도 싸워 이겨 이태리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로마 공화국은 도로를 건설하였고, 도로에 따라 전략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하였고, 주요 상업도시에는 군대를 배치하여 치안을 유지시켰으며, 시리아, 애굽, 마케도니아, 카르타고 등이었다. 카르타고는 해상 무역의 여왕으로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였다.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세 번(푸닉전쟁)있었는데 카르타고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튀니지 공화국이다. 로마 공화국은 아시아를 원정했다. 마케도니아와도 세 차례 전쟁을 했다. 마케도니아는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이로서 소 아시아에 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은 내분에 의해 이태리 북부 게르만족의 침공과 민족 전쟁 발발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침공은 튜톤족과 킴브리족이었는데, 로마에 예속된 프랑스 남부지역을 침공했다. 5년간 그들과 싸웠으며 결국 게르만족을 물리쳤다. 이 와중에 로마 원로원은 술라장군의 공훈을 인정하고 그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소 아시아 동북부 본도(Pontus)에 출정케 했는데, 평민당 지도자 마리우스 장군이 술라장군의 소 아시아 출정을 저지하고 자신이 출정하려고 했다. 두 장군의 싸움은 민족 동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술라 장군이 출정하자 마리우스 장군이 로마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술라 장군이 로마로 돌아와 로마의 통치를 재 정립하게 된다. 술라 장군이 죽은 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세 장군이 동맹을 맺고 원로원과 대립했는데, 서로 암투를 벌이는 바람에 와해되고, 폼페이와 유리어스 시저 장군이 동서로 나뉘어서 각자 영토확장을 하게 된다. 당시 주역은 폼페이, 마르코스-리키니우스 -크리수스, 유리어스 시저의 세 장군이었는데, 삼두정치로 유명하다.  

 폼페이 장군은 중동 아시아를 원정했는데, 이 때가 이스라엘은 하스모니아 왕조시대였다. 이스라엘은 아리스토블루스Ⅱ세와 요한 힐카누스Ⅱ세의 형제 간 왕위 계승 관계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내부 문제로 자연스럽게 로마 군이 침공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두 형제는 로마의 폼페이 장군을 끌어들여 자신이 지도자임을 확인시키도록 했던 것이다. 폼페이 장군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였고, 자연스럽게 하스모니아 왕조는 멸망을 하게된다.  

 그리고 유리어스 시저가 폼페이 장군이 지배하던 중동 지역을 장악하자, 에서의 후손인 안티파타라는 자(이두매 지방의 총독)가 유리어스 시저에게 접근, 애굽 전투에서 공훈을 인정받아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안티파타는 드디어 이스라엘의 행정관이 되었고, 그는 이스라엘을 5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지역 총독을 임명하여 다스리도록 했다. 5개 지역은 예루살렘, 여리고, 아도라, 아마다스, 세포리스(갈랄리)였는데, 차남 헤롯은 세포리스를 다스리는 지역 총독이 되었다.  

 헤롯은 강력한 통치, 반도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했는데, 유대인들 사이에 원성이 높아졌지만 산헤드린 공회(대제사장은 힐카누스Ⅱ세였음)는 힘이 없으므로 헤롯을 정죄하지 못했다. 이후 헤롯은 유리어스 시저 사후 로마의 혼란기에 마크 안토니와 정변을 일으킨 카시우스에게도 접근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혔는데, 카시우스는 헤롯을 이스라엘 전체의 집정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다시 마크 안토니가 정권을 잡자 마크 안토니는 헤롯을 아예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나중에는 왕의 호칭을 주게되었다. 헤롯은 하스모니아의 왕족의 씨를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 피지배와 국권회복의 지배자들 

 

1. 바벨론 제국 

. 느부갓네살왕과 피지배 이스라엘  

(1) 느부갓네살왕 

 느부갓네살Ⅱ세는 43년간 통치했다. 느부갓네살Ⅱ세는 건설 공사에 중점을 두었는데,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 성내로 흐르고 좌우 양편 제방에는 성곽을 쌓았으며, 그 곳에는 견고한 성문 25개가 있었다. 강에는 교량이 있었으며, 교량 양쪽 끝은 왕궁 지역이었다. 왕궁 내부 성곽은 세 겹의 성곽으로 둘려싸여 있었고, 성곽은 색색의 벽돌로 싸여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살과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탁월한 전략가였다. 애굽과는 세 번의 전투가 있었으며, 첫번 째는 주전 605년 칼크미스에서 애굽의 군대를 강타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해버렸다. 두번 째는 주전 572년 애굽으로 쳐들어가 제1 폭포 지역 수에네까지 진군하여 제26왕조 호프라를 강타했다. 세번 째는 주전 569-568년 제26왕조 아마시스가 바벨론을 배반함으로서 느부갓네살Ⅱ세가 애굽을 원정하여 강타했다.  

 

(2) 피 지배 이스라엘 

① 시드기야왕 

 시드기야왕은 느부갓네살Ⅱ세가 왕으로 책봉한 형식적인 왕이었다. 그는 판단력이 부족하고 무능했으며, 난국을 수습하는데 적합하지 못했다. 당시 방백들은 바벨론 제국을 배반할 것을 권유했고, 에돔, 모압, 암몬 등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비슷한 말을 했는데, 거짓 선지자 하나니는 “하나님이 반드시 예루살렘을 지킬 것이고, 느부갓네살의 멍에는 두 해가 가기 전에 꺽어 버리시리라”고 거짓 예언했다.(28:1-2) 

 그러나 예레미야는 반대로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에게 모든 땅, 들짐승까지 주었으니 그를 섬겨야 할 것이며, 만일 그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나라와 백성은 칼과 기근과 모든 재앙을 받을 것이니, 거짓 예언을 청종하지 말라”고 외쳤다.(27:3-22) 그리고 애굽의 도움은 일시적이고, 그들은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것을 예언했다.(34:21-22, 37:6-10) 이 예언이 성취되어 시드기야왕은 죽게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좋은 무화과 나무와 나쁜 무화과 나무를 상징함으로서 시드기야왕과 부패한 왕족들을 책망했다. 좋은 무화과 나무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고, 나쁜 무화과 나무는 시드기야왕과 왕족들, 방백들을 상징한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도덕적으로는 수준이 낮고, 백성들에게는 잘못된 소망과 약속을 한다고 했다.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대중인기를 찾는 자로 평안을 선포하고, “엄중한 말씀”이라는 선지자들의 말씀을 권위있는 말씀처럼 표절하였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백성을 미혹하였다.(23:9-24:10)  

 이학재에 의하면, 이런 거짓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방망이로 거짓 선지자들의 말과 비교할 수 있으며, 껍질인 겨와 알갱이인 밀과의 비교와 같다고 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3가지의 유형을 말했는데, 첫째, 거짓말 하는 자들, 이들은 참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부적절하게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는 자들이고, 둘째, “그가 말씀하셨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들이다. 셋째,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인데, 이들은 대상을 잘 알아 속이는 자들을 말한다. 

 

② 그달리야 총독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느부갓네살왕은 유다를 일개 주로 편입시키고,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을 다스리도록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그달리야 총독이 베푼 연회에서 암몬왕이 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이스마엘이라는 자를 연회에 보냈고, 이를 눈치 챈 총독의 군사 보좌관 요하난이 그달리야 총독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했으나 이를 무시하여, 결국 이스마엘이 그달리야 총독을 살해하고 암몬으로 도망간 사건이 발생했다.  

 요하난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물었는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유다 땅에 거하면 뽑지 않으시고 바벨론의 손에서 구원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하난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애굽으로 갈 때 그를 따라간 자가 많았다.  

 그리고 요하난은 유다에서 섬기던 우상을 다시 섬기게 되었다. “지난 시절 유다에서 살면서 우상을 섬길 때는 먹을 것이 풍부하여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44:16-19)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거하기로 고집한 그들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44:12-14) 

 

③ 바벨론의 유대인 

 유대인이 바벨론에 유배되었던 지역은 바벨론 남쪽 갈대아 우르 지방, 유브라데 강 지류, 관개용 운하 그발 강변에 산재해 있었다.(1:1) 당시 유대인들은 포로로서 끌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곳 생활에 익숙해졌고, 권력 다툼과 분쟁이 없는 그 곳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이었으나 그들의 자녀들은 강대국 바벨론의 시민으로 키우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나 바벨론의 마루둑 신을 숭배하는 일이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를 떠나지 않고 남은 자들의 구속”을 증거한 사실이 그들에게도 요구되었다. 그 날에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며 또한 앗시리아도 심판하신다. 이러한 심판 중에서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남은 자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족의 피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유배된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예루살렘과 서신 연락은 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이 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서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어라, 아내를 맞이하여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온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쫒아 보내었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29:1-14) 라고 희망을 갖게 했다.  

 포로로 잡혀간 공동체에서 사역한 에스겔도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였고,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계속적인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를 행했는지 에스겔 16장은 보여준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네가 난 것을 말하건데,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 아니하였나니,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16:1-5) 

 그들은 영적인 행음자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저 버렸으며, 자신의 죄를 조상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조상들이 한 것 같이 영적 음행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6:1-14, 8:5-17, 16:15-22, 20:30-31) 이러한 백성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대로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회복은 개인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민족의 회복으로 묘사된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성전 속에서 영광을 나타내셨고, 백성들의 죄악으로 성전을 떠나셨다가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사장 에스겔은 유대인 포로 5년 째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다. 포로의 비극은 유다 왕국이 우상 숭배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헛된 소망을 걸고, 회개하지 않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면서, 패전과 망국으로 짓밟힌 동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희망의 예언자가 되었다. “해골 골짜기의 이상”(37)은 절망과 죽음에서 다시 사는 이적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유다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태는 바벨론의 멸망과 포로 사건을 통하여 생겨났는데, 국가적인 멸망은 그들이 가져왔던 모든 확신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마치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골짜기 환상과도 같았다. 그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손”이 임하게 하시고 환상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의 실상이 마치 골짜기의 뼈같음을 보게 하셨다. 그 곳 골짜기에는 뼈가 심히 많고 말라있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었다. 에스겔의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확신없는 대답을 한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 모든 백성들은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소망을 주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을 통하여 소망이 없는 백성들을 부활을 경험하게 하시고 두 나라는 나뉘어졌지만 미래에 한 나라로 회복된다는 소망을 주신 것이다. 이 예언을 통하여 영이 뼈에 들어가 그들을 살리시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에 순종하니 뼈들은 서로 맞아 들어가다가 외형적인 모습을 통해 회복되었다. 그러나 내면적인 회복은 되지 않아 그 속에 영은 없었다.  

 두 번째 명령은 사방에 있는 생기()의 불어옴에 대한 간구인데, 이 예언을 통해 이제 뼈들은 큰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형태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살아나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 회복은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성령을 통해 회복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Ⅱ세에 의해 바벨론으로 옮겨간 왕실 출신 네 명의 소년 중 한명이었고, 그의 나이는 15세 미만이었다. 포로라기보다는 학문을 통달케 하여 왕실관리로 쓰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거한지 3년 후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서 왕의 자문을 맡은 고위 관리로 승진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희망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다니엘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다. 첫째,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이상을 보여주었고, 둘째, 세상의 임금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 그리고 초 자연적인 참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시려고 했다. 첫째는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을 통해 이상을 나타내신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머리에는 정금과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넙적 다리는 동, 종아리와 발가락은 철과 진흙으로 된 신상이었는데, 갑자기 뜨인 돌에 의해 부수어 지는 꿈이었다. 이 꿈은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인간 역사의 흐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둘째,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낙성 예식에 참여하여 절하도록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 낙성예식에 참여하지 않았고, 불만을 품은 갈대아 인들이 왕에게 참소하는데, 결국 그들이 풀무 불에 던져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꿈을 또 꾸는데, 이 꿈은 “한 거대한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랐고, 그 가지들이 무성하여 열매가 많아지고 온갖 새들과 짐승들이 그 나무 열매를 먹고 그늘에서 쉬게되는데, 하늘에서 파수꾼이 내려와 외치며, 나무를 잘라버리나 그루터기는 남겨둔다. 다니엘이 해석한 꿈은 “나무를 베어 없애라”는 파수꾼의 명령은 왕에게 내려질 수치를 뜻한다고 해석해 준다. 따라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죄를 끊고 공의와 구제를 행할 것을 권고했다. 느부갓네살은 실제 들 짐승처럼 7년을 살았고, 정신이 돌아온 뒤로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 느부갓네살이후 왕들 

 

(1) 에월므로닥왕∼ 나보니두스왕 

 느무갓네살왕의 대를 이어 아들 에월 므로닥이 이었으며 2년 간 통치했다. 그는 매부 네르갈 사례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네르갈 사례셀이 3년간 바벨론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느부갓네살왕때 왕의 박사장으로 재직한 방백이었으며, 그의 통치기간 중 소 아시아 남쪽 타우라스 산맥을 원정한 사실 외에는 기록이 없다. 네르갈 사례셀이 죽자 아들 라비시 마르둑에게 계승되었지만, 나보니두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나보니두스는 어머니가 월신 숭배자였다. 그는 딸을 월신 대사제로 임명하여 우르도시에서 월신을 숭배했다. 그러나 마르둑 사제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보니두스는 아들 벨사살을 섭정 왕으로 세우고 아라비아 북서부 테마라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2) 벨사살왕 

 바벨론 제국 마지막 왕 벨사살은 과거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그릇을 술잔으로 사용하려했다. 그 때 왕궁의 석회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데, 아무도 번역을 못하자 벨사살왕과 귀족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태후가 그 소식을 듣고 다니엘을 소개하여 꿈을 해석하는데, 벽에 나타난 글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해석하면 “각각 수를 세고, 무게를 달며, 나눈다” 라는 의미였다. 벨사살은 그날 밤 살해되었고,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벨사살왕 때 선지자 다니엘은 환상을 보게된다. 큰 바다에서 네 짐승이 올라오는데, 첫째는 바빌로니아를 상징하는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이며, 둘째는 메대와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세 갈빗대를 물고 있는 곰, 셋째는 그리이스를 상징하는 머리에 열 뿔이 있는 짐승으로 무섭고 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다니엘7:7-8) 이학재에 의하면, 큰 바다는 하나님께서 이방 세계 또는 이 세상을 상징하게 된다. 세상 권세는 물로 상징되는데, 고대의 대제국인 바벨론, 메대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각각 상징되는 네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다고 묘사하고 있다. 네 짐승과 동일시되는 네 왕이 세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바다의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은 세상 나라의 흥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네 짐승에서 사자, 독수리, , 표범이 나타나는데, 바벨론은 독수리이며, 날개를 가지고 있다. 니므롯에 있는 한 신전 입구 등 바벨론의 유적 여러 곳에서 발견된 날개 달린 사자의 조각은 바벨론 제국을 날개 달린 사자로 묘사한 본문 내용의 정확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 날개가 뽑혔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죽은 뒤 바벨론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 사실을 의미한다.  

 메대와 페르시아는 곰으로 갈비뼈 3개를 물고 있다. 곰은 그 용맹성이란 측면에서 사자보다는 열등한 짐승이다. 곰을 가리키는 바 메대와 페르시아 두 나라가 연합하여 제국을 이루었다가 그 두나라 중 한 나라가 우세하여져서 하나로 단일화 될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곰이 물고 있는 세 갈비대는 당시 이 나라가 정복한 바벨론, 리디아, 이집트를 의미한다.  

 그리이스를 표범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새 날개와 머리 4개를 가지고 있다. 표범과 같다고 하는 것은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을 상징하며, 그리이스가 민첩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실제로 알렉산더 제국은 세계적인 제국을 형성하는 놀랍도록 신속한 정복력을 보였다. 그가 죽자 당시 그의 부하였던 안티파타, 리시마쿠스, 셀리우쿠스, 프톨레미가 각각 4 지역으로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다. 이학재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다니엘서 2(느부갓네살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초림에 대하여, 그리고 다니엘서 7(벨사살왕의 꿈)은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한다.  

 뿔은 권세를 상징한다. 열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이다. 넷째 짐승이 열 뿔을 가졌다는 것은 로마가 전무 후무하게 큰 권세를 가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열 뿔은 로마가 엄청나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자체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기까지의 사이에 나타났다가 멸망 할 모든 나라와 세력들을 지칭한다.  

 작은 뿔은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는데, 이학재는 이것은 종말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적그리스도가 인격을 소유한 존재로 인간적 지혜와 성정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으로부터 부여받은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존재를 가리킨다.  

 보좌에 앉아계신 “옛적부터 계신 이”는 희고 깨끗한 모습으로 심판을 준비한다. 넷째 죽임을 당한 뒤 불에 던져지고, 남은 짐승은 권세를 빼앗긴 채 생명만 유지한다. 그리고 인자는 영원한 권세를 가지게 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메시야 적 왕국으로 종말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옛적부터 계신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불 붙은 바퀴는 하나님의 심판이 온 세상에 신속히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 남은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의미는 멸망의 정도에 있어서 앞의 세 짐승의 멸망의 정도가 넷째 짐승보다는 심하지 않고, 멸망의 기간도 오래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학재에 의하면, 선지자 다니엘은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었더니” 라고 하는데, 이 뿔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는 먼저 있었던 자들과 다르고 마지막에 일어날 권세자 또는 나라가 로마 제국의 멸망 후 나타날 강력한 권세자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할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력을 세울 것이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 환난의 후 삼년을 지칭하는가? 아마도 상징적으로 볼 수 있는데, 한 때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감추어져 있는 기간으로서 적그리스도의 활동 기간으로 허락된 불특정한 기간을, 그리고 두 때는 한 때가 연장된 기간으로서 적그리스도의 권세가 더욱 강화되는 기간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반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적그리스도 통치 기간을 단축하여 갑자기 중단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 재림이 있기 전 성도들은 일정 기간 동안 잠시 사단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환난과 핍박을 겪게 되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기간이 단축되고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된다는 것이다. (다니엘 7) 

 다니엘은 벨사살왕 3년에 또 다시 수양과 수염소의 환상을 보게된다. 선지자 다니엘은 영으로 엘람의 수산성(페르시아 수도)에 있었고, 강변에서 환상을 본다. 환상 중의 두 뿔 가진 수양은 한 뿔이 다른 뿔보다 길며,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다. 여기서 두 뿔은 메대와 페르시아를 상징하고 나중에 길게 난 것은 페르시아 제국을 의미한다. “내가 본 즉 그 수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라고 하는데 메대와 페르시아는 나중에 완성된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인 엘람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는 바벨론과 수리아, 소 아시아를,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와 카스피 해 인근지역 국가들을 정복한 것을 의미한다. 또 수염소가 빠른 속도로 서편에서 오는데 이는 헬라 제국을 상징한다. 염소의 현저한 뿔은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키며, 그는 메대페르시아 왕국을 멸망시킨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왕인 다리오Ⅲ세는 앗수스 전투와 아르벨라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전함으로서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게 됨으로 본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 후 작은 뿔을 상징하는 안티오쿠스Ⅳ세는 남편과 동편과 영화로운 땅 즉 팔레스타인을 차지한다. 그는 하늘의 군대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다. 제사를 금지시키고, 성소를 파괴하였다.(다니엘8:11-12) 

 

2. 페르시아 제국 지배하의 이스라엘 

 

. 고레스Ⅱ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유대인 귀환 포고령이 내리자, 유대인 일부는 성전 기명을 가지고 귀환 길에 올랐는데, 49,897명이었다. 유대인은 고레스왕의 조서에 따라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고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운하여 건축 작업을 예비했다.(에스라3:7) 다음 해 2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기초를 놓았고, 백성은 성전 건축 역사에 참여했다. 당시 노인들은 첫 솔로몬 성전을 보았기 때문에 성전의 지대가 놓임을 보고 감개무량하여 대성 통곡하고, 젊은이들은 기쁜 함성을 올렸다(에스라3:8-13) 

 제사장 여호수아는 바벨론에 유배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이다. 그들의 이름이 역대기와 학개서에는 여호사닥과 그의 아들 여호수아로 기록되어 있다.(대상6:14, 학개1:1) 성전 공사 진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귀환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에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이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함께 공사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에스라4:2-10) 그들은 앗시리아 제국 통치 당시 사르곤, 에살핫돈, 앗술바니팔왕의 정책에 따라서 타 지방에서 팔레스타인에 이주하여 북 이스라엘 나머지 백성과 혼혈된 민족으로서 우상과 하나님을 혼합 숭배하고 있었다.(왕하17:34) 총독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페르시아 방백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유대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에스라4:4-5) 유대인들 상호 마찰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은 생계 때문에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학개1:3-11)  

  

. 캄비세스Ⅱ세 ∼ 다리오Ⅰ세, 스룹바벨총독,  

 

(1) 캄비세스 황제 

 고레스 황제는 바벨론 총독을 캄비세스에게 임명했으며, 주전 530년 고레스 황제가 죽자 캄비세스 총독이 페르시아 황제가 되었다. 캄비세스 황제의 기간 중에도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개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2) 다리오Ⅰ세 

성전 건축 공사는 주전 520년에 이르기까지 중단되어 있다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충고로 유대인들은 공사를 재개하기 시작하였다.(학개1:8)(스가랴5:1) 그러자 또 다시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강 서편 총독 닷드네와 페르시아 제국 관리 스달-보스네 및 그들의 동료였다.  

 다리오 대왕은 지난날 고레스 황제의 조서를 서고에서 찾아 그 내용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유대인의 귀환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도록 명한 것과 또한 왕실 재정에서 비용을 부담할 것을 확인했다. 왕은 강 서편 총독과 방해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 성전 공사를 막지말고 멀리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왕의 재산에서 그 경비를 유대인에게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지원하도록” 조서를 내렸다.(에스라6:1-15)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 공사는 또 다시 재개되어, 완공되었지만 로마의 지배하에 티토 장군의 공격을 받고, 성전은 다시 훼손되고 말았다. 선지자 학개는 네 번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시기를 원했다. 첫번 째 메시지는 지금이 바로 그 때이며,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전은 황폐한데, 자신들의 집은 장식한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도록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백성들은 모두 다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였다.(학개1:1-11)  

 두번 째 메시지는 말씀이 주어진 날이 장막절이 끝나는 기간이었다. 장막절은 주로 추수를 축하하며,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뻐하는데 성전의 의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은 얼마나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처음 전의 영광보다 나중의 전의 영광이 클 것이라고 약속하신다.(학개2;3)  

 세번 째 메시지는 거룩함으로 일하라고 하신다. 부정하게 된 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백성들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부정하다고 단정한다.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관심을 더 가져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후부터 돌이켜 보라고 한다. 성전의 기초가 쌓이던 날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며,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학개2:10-19)  

 네번 째 메시지는 네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스룹바벨을 하나님의 인장으로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학개2:20-23) 

 선지자 다니엘도 예언을 했다. “바사에서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에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충동하여 헬라 왕국을 칠 것이며”(다니엘11:2)  

 송형철에 의하면, 세왕 은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왕이다. 넷째왕은 아하수에로왕으로 알려져 있다. 에스더의 남편이다. “장차 한 능력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으로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11:3-4) 이는 세계를 지배하게 될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톨레미 왕조에 대한 예언으로 “남방의 왕들은 강할 것이나 그 군주들중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의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11:5), 시리아와 애굽의 화친과 분규를 예언하는 것으로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단합하리니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가서 화친하리라, 그러나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도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때 도와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11:6).  

 톨레미Ⅲ세의 보복으로서 살해당한 안티오크스Ⅱ세의 아내 베레니케(톨레미Ⅱ세의 공주)일로 톨레미Ⅲ세의 보복에 대한 예언을 했다. “그러나 그 공주의 본 족속에게서 난 자 중의 한 사람이 왕위를 이어 권세를 받아 북방 왕의 군대를 치러 와서 그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쳐서 이기고, 그 신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과 은과 금의 아름다운 그릇들을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아니하리라”(11:7-8),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와 애굽이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남방 왕은 크게 노하여 북방 왕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는 그의 손에 넘겨준 바 되리라, 그가 큰 무리를 사로 잡은 후에 그의 마음에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 명을 엎드려 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11:11-12) 

 북방 왕 셀레우쿠스 왕조의 승리와 유다 150년의 지배를 예언한 것으로 “이 에 북방 왕이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가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으므로 오직 와서 치는 자가 마음대로 행하리니, 그를 당할 사람이 없겠고, 그는 영화로운 땅에 설 것이요, 그의 손에는 멸망이 있으리라”(11:15-16),  

 로마의 중동 아시아에 대한 개입이 예언되었다. 시리아와 애굽과의 분쟁의 조정에서 로마는 안티오쿠스Ⅲ세의 딸 크레오파트라Ⅳ세를 애굽왕 톨레미 에피파네스에게 주는 정책 혼사로 양국을 화친케하는 것이었다. 안티오쿠스Ⅲ세는 애굽을 그의 수중에 넣기 위해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가 도움이 될 줄 알고 이를 승낙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강직한 성품의 여인으로서 도리어 남편인 애굽 왕 톨레미 에피파네스 편에 서게된다. “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의 나라를 망하게 하려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11:17) 

 로마는 인질 안티오쿠스Ⅳ를 석방했는데, 14년 만에 인질에서 풀려나 시리아에 온 안티오쿠스는 그의 동생 셀레우쿠스Ⅳ세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이미 국고 담당 헬리도루스에 의해 살해되고, 왕위를 찬탈당한 사실을 알게된다. 이에 격분한 안티우쿠스 에피파네스는 그의 형제 아타라수와 페르가몬왕으로부터 군사와 재정 지원을 얻은 후 왕위를 찬탈한 헬리도루스와 싸워 그를 생포하여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는다. “그 왕위를 이을 자가 압제자를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없이 몇 날이 못되어 망할 것이요”(11:20) 

 3차 애굽 원정과 철수로서 주전 168년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왕은 또 다시 애굽 수도 멤피스에 침공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자 왕은 로마 대사를 만나고 로마 대사는 안티오크스왕에게 말하기를 시리아 군이 애굽에서 철수하든지 로마와 전쟁을 감행하던지 택일 하라고 통첩했다. 안티오크스는 애굽에서 철수하면서 예루살렘에 분풀이 했다. 이 예언은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전번보다 못하리니,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맺은 거룩한 언약에 분노하였고, 자기 땅에 돌아가서는 맺은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필 것이며”(11:29-30) 

 예루살렘에서 우상숭배가 자행될 것을 예언했다. 안티오크스는 주전 167 12월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 신에게 봉헌하고 신상을 세우고 제단을 쌓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먹고 마시고 추잡한 곳이 되었다. 유다 지방 회당과 율법 책은 모두 불사르고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11:31) 

 선지자 다니엘은 유대인 박해와 성전 회복에 대해서 예언했다.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왕에 의해 유대인이 박해를 당할 것과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세워 더럽힐 것과 또한 성전이 깨끗함을 받을 것도 예언했다. “내가 들은즉, 한 거룩한 이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이가 그가 말하는 이에게 묻되, 환상에 나타나는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이를 고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2,300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8:13-14) 

 

. 아하수에로Ⅰ세,  에스더 왕후 

 

(1) 하만의 음모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도 많은 유대인이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모르드개와 그의 사촌누이 에스더를 세워 유대인을 지도하게 하셨다. 아하수에로 왕 통치 3년 그는 나라의 부요함과 그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고 왕비 와스디를 참석하도록 했는데, 왕비가 오지 않음으로서 왕이 격분하여 왕비 와스디를 폐하여 버렸다. 그 이후 아하수에르왕은 에스더를 왕비로 맞아들인다.  

 아하수에르왕에게는 재상 하만이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비롯하여 유대인을 경멸하고 학살하려고 했는데, 막대한 뇌물을 왕에게 바치면서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한다”(에스더3:8) 라고 참소했다. 아하수에로왕 12년 왕은 하만의 송사를 옳게여겨 페르시아 제국 전체 주에 조서를 내려 12 13일 하루 동안 유대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이도록 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것이었다.(에스더3:12-15) 

 

(2) 왕후 에스더의 유대인 구출 

 페르시아 제국 왕실 규례는 왕이 호출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왕 앞에 나설 수 없으며, 만일 이를 위반하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모르드개”로부터 유대인 학살에 대한 왕의 조서가 내려진 소식을 듣자 왕후 에스더는 우선 3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왕후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실 규례를 어기고 왕좌에 앉은 왕 앞에 나아갔다.  

 이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왕은 금홀(지팡이)을 들어 왕후 에스더를 맞이했고, 왕후는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했다. 주연 상에서 흥겨운 왕은 왕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왕후 에스더는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다.(에스더7:3-4) 곧 하만의 학살 음모에서 유대인을 구출해 달라는 왕비 에스더의 간청이었다.  

 왕은 그 음모가 하만 자신을 존귀케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되자, 심히 격분하여 연회장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조서를 내렸기 때문에 이를 변개하는 것은 왕실 규례가 아니므로, 아하수에르왕은 유대인 스스로 생명과 재산을 지키도록 새로운 조서를 페르시아 제국 각 주에 내렸다.(에스더8:8-14) 따라서 반 유대주의자 하만의 음모는 분쇄되었고, 그가 모르드개를 달고자 세운 장대에 하만이 달렸다. 유대인들은 봉기하여 그들의 대적과 싸워 75,000명을 살해하고, 그 중에는 수도 수산에서 500명과 하만의 열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에스더8-9)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만의 음모에서 구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달월(태양력2, 3) 14, 15일을 부림절로 정하고 대대로 지키고 있다. 부림절(Feast of Purim)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Pur , 제비뽑는 것의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 아닥사스다왕, 느헤미야 총독 및 제사장 에스라 

 

(1) 유대인 귀환에 대한 왕의 조서 

 왕의 2차 조서는 제1차 조서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갈 뜻이 있는 사람은 귀환할 수 있도록 권유했다. 왕은 풍성한 예물도 그들에게 주어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하고, 또한 강 서편 총독에게 나라에 비축된 물건을 주어 성전에 쓰여질 수 있도록 지시했다.  

 제사장 에스라는 아하의 강변(바벨론근처)에 이스라엘로 귀환할 자들을 모으고,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리고 귀환했는데, 1,500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 레위인이 없었으므로 제사장 에스라는 레위인 수십 명과 성전에서 종사하는 막 일꾼 220명을 모아 함께 귀환했다.(에스라8:15-23) 그들은 주전 458 1 12일에 아하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으로 대적의 위험없이 3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제사장 에스라는 귀환한 백성을 예루살렘에 소집하여, 누구든지 3일내에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한다는 강력한 소집 통보를 했다. 제사장 에스라는 성전 뜰에서 모인 백성들에게 이방 여인을 취하여 이방화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기로 결의하고 족장과 장로들에게 실태를 조사하도록 위촉했다. 3개월간 명단을 작성했는데,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사람도 있었다. 2차 유대인의 귀환 14년 후 아닥사스다왕 20년에 느헤미야를 인솔자로 하여 유대인을 귀환하도록 허용했다.  

 총독 느헤미야는 이후 페르시아 제국 수도 수산 왕궁으로 돌아가고 총독 자리를 동생 하나니에게 맡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헤이해지고, 사회 윤리가 붕괴되며, 율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듣고, 그는 왕을 설득하여 다시 총독이 되어 귀국했다. 당시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암몬 총독 도비야에게 성전 창고를 사용하도록 허용해 버렸는데, 느헤미야 총독은 암몬 총독의 기물을 던져버리고 성전을 정결하게 했다.(13:4-9)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을 범하고 두로 사람들과 상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느헤미야 총독은 예루살렘의 성문을 닫고 안식일에 상거래를 못하도록 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 이방인과의 통혼, 제사장들의 타락을 꾸짖고, 백성들이 당연히 구별하여 바쳐야 할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부당한 처사를 책망했다.(1:6-18, 3:7-18)   

 

(2) 성곽 건축 중단 조서 

 당시 예루살렘 성곽은 공사가 중단되고, 훼파된 상태였다. 아닥사스다왕은 성곽 건축 중단조서를 내렸는데, 당시 사마리아 총독 르흠과 서기관 심새는 지난 날 이스라엘 역사를 들어 왕에게 고소하기를 “만일 예루살렘 성곽이 건축되면 왕을 배반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 일로 왕의 조서가 내리자 사마리아 총독은 성곽 건축공사를 중단시키고 말았다.  

 총독 스룹바벨 이후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관장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에 총독이 없었다. 어느 날 아닥사스다왕이 느헤미야를 만나 수심이 가득찬 모습을 보고 물었는데,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아뢰었다.(느헤미야2:4-6) 이에 왕은 그가 내린 조서를 변개하고 느헤미야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예루살렘 성곽 건축 공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총독으로 부임한 느헤미야는 성곽 공사를 진행시켰다. 공사가 착수되자 사마리아, 암몬, 아라비아 지방 지도자들이 여전히 성곽 공사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심 가운데 성곽공사를 52일 만에 마무리하게 된다.  

 

. 아하수에로Ⅱ세 ∼ 다리오Ⅲ세 

 

 아닥사스다왕이 죽자 그의 세 아들간의 왕위 쟁탈전이 있었다. 장남 아하수에로Ⅱ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수 개월 만에 살해되고, 둘째 아들 속디아누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수 개월 만에 살해되었다. 셋째 아들 오코스가 왕위를 찬탈했던 것이다. 그가 다리오Ⅱ세 였고, 다리오Ⅱ세는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아닥사스다Ⅱ세 였다. 두 형제도 왕위 쟁탈을 벌였다.  

 아닥사스다Ⅱ세에게 360명의 아내와 후궁이 있었고, 아들이 11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중 장남이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자살하고 말았다. 셋째 아들이 왕에 올랐는데, 아닥사스다Ⅲ세이다. 그는 애굽 주둔 사령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사령관은 그의 아들 아르세스를 왕위에 올렸는데, 3년 후 내시 신하인 바고아스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바고아스는 죽은 아르세스왕의 육촌 형제인 다리오Ⅲ세를 왕위에 세웠다. 다리오Ⅲ세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때 자기 신하에 의해 죽고 말았으며, 이로서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3. 헬라제국 지배하의 이스라엘 

 

. 셀레쿠오스Ⅰ세 ∼ 안티오크스Ⅳ세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친 나라는 시리아를 점령한 셀레우쿠스Ⅰ세 때부터 였다. 그는 통치 지역에 헬라 문화를 심었다. 75개 성읍에 학교를 세우고, 헬라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오론테스 강 기슭에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안디옥으로 명명했다. 그 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셀레우쿠스Ⅰ세 이후 안티오크스Ⅰ세, 안티오크스Ⅱ세, 셀레우쿠스Ⅱ세, 셀레우쿠스Ⅲ세, 안티오크스Ⅲ세, 셀레우쿠스Ⅳ, 안티오크스Ⅳ세 까지 이어진다.  

 안티오크스Ⅳ세 때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이나 다름없이 변해 있었다. 헬라어를 구사하고, 헬라 식 이름을 갖고, 헬라 의상을 즐기면서 풍습을 따랐다. 반면에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고유의 전통을 준수하며, 유대교의 교훈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갈리게 되었다. 안티오크스Ⅳ세는 유대인의 대제사장 직을 임명했는데, 오니아스Ⅲ세였다. 그 당시 대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데, 왕이 임명하였으니 경건한 유대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제사장 오니아스Ⅲ세는 피살되고 말았다. 오니아스Ⅲ세의 동생 야손이라는 자가 왕을 방문하여 자기를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왕은 흔쾌히 이를 수락하고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대제사장 야손은 히브리인의 전통과 관계없이 성전 인근에 학교를 세우고, 운동 경기를 했으며, 젊은이들은 헬라 풍으로 사는 모습으로 되고 말았다. 대제사장 야손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시몬이라는 사람의 동생 메네라우스였는데, 그는 왕에게 가서 뇌물을 많이 주고 대제사장직을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역시 왕은 야손을 해임시키고, 메네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주었다.  

 전쟁으로 안티오크스Ⅳ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 전 대제사장이었던 야손이 1,0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함으로서 대제사장 메네라우스는 아크라 요새로 도망했는데, 안티오크스Ⅳ세 왕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며, 야손의 행위에 대해서 예루살렘으로 침공하므로 야손은 도망해버렸고, 안티오크스Ⅳ세는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빌립이라는 사람을 총독으로 내세우게 된다. 그리고 왕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신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왕은 유대교의 존재를 없애려고 유대인의 공동체를 폐지했다. 그는 포고령을 내려 여호와 숭배, 안식일 준수, 할례, 부정한 음식 가리는 것, 율법지키는 것 등 전통적 관습을 폐지시켰다. 율법 책들을 훼손하면서 이에 위반하는 자들을 처형한다는 포고 령을 공포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먹고 마시며, 추잡한 행위의 장소가 되었으며, 회당의 율법 책은 모두 불사르고, 모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안티오크스Ⅳ세에게 박해를 당하자 유대인들이 봉기했는데, 예루살렘 서북쪽 약 25km 거리의 지방 작은 마을 모딘이라는 지역의 한 노년 제사장 맛타디아스에 의해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봉기의 원인은 시리아의 한 장교가 제우스 우상 제단에 유대인을 모아놓고 절을 하라고 했는데, 그 때 한 유대인이 절을 하자 제사장 맛타디아스가 격분하여 우상 제단을 훼손하고 같이 있던 다섯 아들이 장교를 죽이고 절을 한 유대인을 쳐 죽인 사건이다. 이 봉기사건이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자 합세하기 시작했는데, 안티오크스Ⅳ세는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고자 했으나 맛타디아스의 방어 벽을 뚫지못했다.  

 제사장 맛타디아스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이었다. 제사장 맛타디아스는 후계자로 요한을 임명했다. 유다의 다른 이름은 유다 마카비였다.  

 

. 유다 마카비의 독립투쟁과 시리아 왕가의 분쟁 

 

 유다 마카비는 6년 동안 유대인 유격대를 지휘했다. 그의 유격 작전은 시리아 군의 수비가 없는 작은 마을을 산발적으로 공격하여 점령했는데, 점차 유대인들이 많이 합세하고 시리아 군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다 마카비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을 군사로 선발하였는데, 지휘한 지 3년이 안되어 시리아 정규 군 4개 부대를 격파했다.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주변과 벧호론 전투, 벧술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며,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성전에 올림피아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없애고, 새 제단을 쌓았으며 봉헌을 했다.  

 안티오크스Ⅴ세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그의 충신 리시아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은 다시 안티오크스Ⅴ세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유다 마카비와 전투를 벌이던 안티오크스Ⅴ세는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왕과 리시아스 장군과 대제사장 메네라우스는 안디옥으로 돌아가 버렸다. 안티오크스Ⅴ세는 대제사장의 실책으로 유다 마카비의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대제사장을 처형해 버렸다. 그의 후임으로 알키무스(일명 엘리야김)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는데, 이후 시리아 왕가에 정변이 일어나 안티오크스Ⅴ세와 리시아스 장군이 사촌 데메트리우스Ⅰ세에게 피살되고 만다.  

 데메트리우스Ⅰ세는 대제사장 알키무스와 친 헬라파 유대인으로부터 유다 마카비를 제거해주도록 요청을 받았는데, 데메트리우스Ⅰ세는 부하 박키데스 장군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유다 마카비를 소탕하도록 했다. 결국 유다 마카비는 죽고 말았는데, 그의 형제 시몬과 요나단이 그의 시신을 고향 모딘 묘소에 매장했다. 박키데스 장군은 유다 마카비에 협력했던 유대인들을 살해했으므로 유다 마카비의 형제들과 무리들은 도주했으며, 막내 동생 요나단을 지도자로 추대하게 된다.  

 이 무렵 시리아 왕가에서는 또 다시 왕위 쟁탈이 벌어졌는데, 안티오크스Ⅳ세의 둘째 아들 알렉산더 바라스가 시리아 왕권을 찾기 위해 데메트리우스Ⅰ세를 죽이게 된다. 알렉산더 바라스는 요나단에게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는데,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주었다. 데메트리우스Ⅰ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메트리우스Ⅱ세였다. 데메트리우스Ⅱ세에게 알렉산더 바라스를 공격할 기회가 왔는데, 애굽의 톨레미 왕가의 톨레미Ⅶ세와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 원군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톨레미Ⅶ세는 그의 딸 크레오파트라를 데메트리우스Ⅱ세에게 아내로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데메트리우스Ⅱ세가 정권을 잡게되고 알렉산더 바라스가 임명한 대제사장 요나단을 안디옥으로 소환했다.  

 데메트리우스Ⅱ세는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서 대제사장 요나단에게 군사 3000명을 지원을 요구하는데, 대제사장 요나단은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트리포 장군이 백성들의 요구가 데메트리우스Ⅱ세가 아닌 안티오크스Ⅵ세가 왕위에 올라야한다고 하면서 안티오크스Ⅵ세를 왕위에 추대를 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시리아는 분열을 해버렸고, 대제사장 요나단이 안티오크스Ⅵ세를 지지하면서 왕위는 안티오크스Ⅵ세가 장악했다. 그런데 안티오크스Ⅵ세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트리포 장군이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모략을 꾸미고 있었는데, 눈에 가시가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트리포 장군은 어느날 대제사장 요나단의 군사를 살해하고 요나단을 포로로 만들어 갈릴리 호수 동쪽 바스가마에서 요나단을 처형해 버렸다.  

 요나단의 형제 시몬과 백성들은 요나단의 시체를 고향에서 장사하고, 유다 백성들은 시몬을 통치자로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트리포장군은 역시 어린 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는데, 안티오크스Ⅶ세가 트리포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이에 대제사장 시몬이 안티오크스Ⅶ세를 물자와 군사를 지원하여 트리포 장군을 축출 처단해버렸다. 그런데 안티오크스Ⅶ세는 대제사장 시몬의 은혜를 저버리고 유다를 공격해왔던 것이다. 대제사장 시몬은 최후를 맞게되었다. 다행히 시몬의 아들 힐카누스는 참사를 모면했다. 유대인들은 다시 힐카누스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4. 하스모니아 왕조의 건립 

 

.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의 가문은 경건한 보수주의자로서 바리새인에 의해 자라났으나 사두개의 교훈을 따르고, 그들과 협력하여 정사를 처리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교리 사상은 그 전에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두개파의 교훈은 모세오경만 그들의 교훈을 삼았고, 예언서는 제외됨에 따라 내세와 부활과 천사도 그들의 교훈에서 제외되었다. 어느 날 연회 석상에서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은 그의 통치에 대해서 지적할 일이 있으면 지적하라고 했는데, 엘르아살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대제사장의 어머니가 안티오크스Ⅳ세에게 잡혀서 부정한 일이 있었는데, 대제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부정한 일이란 레위기 21 14-15절에 나오는 “제사장은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를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자손이 그의 백성 중에 속되게 하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은 격노했고, 엘르아살이 바리새파이므로 이후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은 사두개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에세네파가 등장하는데,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그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금욕 생활을 하면서 성경 연구에 몰두하고 그들끼리는 서로 사랑하는 반면, 밖의 사람들은 미워하는 그런 부류였다. 그들은 두 메시야 곧 아론의 제사장적 메시야와 이스라엘의 왕적 메시야로 두 역할을 겸한 한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고 있었다. 결국 로마의 정복으로 로마의 압제에 놓이면서 “하시딤”(하나님의 충성된 자)에서 발전하여 바리새인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일들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으로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데 있었다. 그 기준이 얼마나 엄격한지 성전의 문을 여닫는 것도 노동이라고 하여 그들의 손으로 하지 않고, 믿지않는 사람들이 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상당 수를 차지하는데, 종교적인 입장은 자유주의인 것으로 모세오경 이외에 어떤 계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불멸, 부활, 천사, 귀신 등을 믿지않고 배격하였다.  

 

. 아리스토블루스Ⅰ세 ∼ 안티고누스Ⅱ세 

 

(1) 아리스토블루스Ⅰ세  

요한 힐카누스 대제상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임종 당시 정권을 그의 아들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그의 아내로 하여금 그의 대를 이어 하스모니아 왕조를 다스리게 했다. 따라서 그의 맛 아들 아리스토블루스가 그의 어머니를 투옥하여 정권을 빼앗고 그의 형제 중 안티고누스를 제외한 삼 형제를 투옥했다.  

 주전 166년 아리스토블루스는 대제사장이었으며, 하스모니아 가문에 의한 이스라엘 통치 후 처음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바벨론 포로 이후 480년 만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은 1년의 짧은 기간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근거로 이스라엘 왕은 다윗의 자손이어야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리스토블루스왕은 병에 걸려 누워있을 때, 장막절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동생 안티고누스가 관복을 입고 군사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는 광경을 보고 아리스토블루스에게 모함을 했다. 그는 그 말을 믿고 즉시 자객을 시켜 동생 안티고누스를 살해해버렸다. 그리고 아리스토블루스왕도 병으로 죽고 말았다. 

  

(2) 알렉산더 얀네우스왕 

 알렉산더 얀네우스왕은 15년 동안 통치하면서 영토 확장을 했는데, 왕은 아라비아 원정 중 아랍인들에게 포위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왕이 부정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왕은 안전하게 귀환했고, 바리새인들은 쫒기게 되는데, 시리아로 도망하여 시리아왕 데메트리우스Ⅲ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시리아 왕은 알렉산더 얀네우스왕을 공격했지만 바리새인들이 시리아가 다시 이스라엘을 지배할 것을 우려해 알렉산더 얀네우스왕과 함께 시리아를 축출해버리고 말았다. 왕은 이후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했으며, 왕이 중병에 걸려 죽을 때 왕은 왕비에게 정권을 물려주었다. 바리새인들을 많이 등용하라는 유언을 남겨 그 후에 바리새파가 대거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청소년에 대한 의무교육 제도의 법령을 공포하는 등 많은 공헌을 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지방의 회당에서 토라와 지혜서를 가르쳤다.  

 

(3) 요한 히카누스Ⅱ세와 아리스토불루스Ⅱ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여왕이 죽자 큰 아들 힐카누스Ⅱ세에게 왕위가 계승되었고, 대제사장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동생 아리스토블루스Ⅱ세를 부추겨 정권을 빼앗도록 충동했다. 아리스토블루스Ⅱ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니 힐카누스Ⅱ세는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 와중에 안티파타라는 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하스모니아 왕국 남쪽 이두매 지방 총독이었는데,  아리스토블루스Ⅱ세가 그의 형의 왕위를 찬탈한 것은 불법이라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은퇴한 힐카누스Ⅱ세에게  아리스토블루스Ⅱ세가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거짓 선동을 하여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를 끌어들여 모반을 계획했고, 두 형제간에는 또 전쟁이 일어나 다시 힐카누스Ⅱ세가 정권을 잡게된다.  

 이때 로마 폼페이 장군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메섹에 주둔하고 있다가 두 형제의 싸움을 핑계로 그의 부하 장군 스카루스를 예루살렘에 파견했는데, 힐카누스Ⅱ세와 아리스토블루스Ⅱ세는 각 각 스카루스 장군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스카루스 장군은 아리스토블루스Ⅱ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때 그의 원수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는데, 이두매 지방 총독 안티파타의 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안티파타는 폼페이 장군에게 아리스토블루스Ⅱ세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폼페이 장군은 아리스토블루스Ⅱ세를 옥에 가두고 힐카누스Ⅱ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시리아 총독 하에 예속시켜버렸다.  

(4) 안티고누스Ⅱ세 

 폼페이 장군은 아리스토블루스Ⅱ세를 잡아 로마로 끌고 갔으며, 아리스토블루스Ⅱ세의 두 아들 중 알렉산더Ⅱ세는 로마에 저항하다가 죽고말았다. 또 다른 아들 안티고누스Ⅱ세는 파르티아 왕국과 협정을 맺는데, 파르티아에 협력하면 나중에 하스모니아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하게된다. 그리고 파르타 왕국 왕자 파고루스와 바르자 페렌 장군은 안티고누스Ⅱ세와 연합하여 예루살렘의 총독 헤롯을 공격하여 제압하게되고, 헤롯은 이두매 지방 사해 서쪽 마사다로 도주했고, 대제사장 힐카누스Ⅱ세는 잡혀 투옥되게 되고, 안티고누스Ⅱ세는 힐카누스Ⅱ세가 대제사장이 되지 못하도록 양귀를 잘라 불구자가 되게 했다. 

 헤롯은 마사다에서 로마로 피신했고, 안티고누스Ⅱ세를 제거하기 위해 로마의 마크 안토니를 설득하여 군대를 주면 이스라엘을 점령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옥타비우스(가이사 아구스도)가 흔쾌히 승낙하여 헤롯에게 군사를 주게하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해버린다. 로마를 등에 업은 헤롯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갈릴리에서 싸웠으며, 욥바 항을 침공하고 이두매를 점령했으며, 요단강까지 진격했다. 헤롯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전에 사마리아에서 힐키누스Ⅱ세의 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하여 하스모니아 왕족 행세를 했다. 예루살렘은 포위 5개월 만에 함락되고 안티고누스Ⅱ세는 생포되었고, 마노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로서 하스모니아 왕조는 끝이 나게 되었다.  

 

5. 로마제국  

 

. 헤롯 

 

(1) 성전 및 공공시설 건축 

 헤롯은 명성을 위해 대대적인 건설 사업을 벌였다. 극장과 경기장을 세웠고, 예루살렘 북쪽 경사진 언덕위에 값진 돌과 황금으로 장식한 왕궁을 건축했다. 왕국에는 좌우로 연결된 부속 건물이 있어, 하나는 옥타비우스로, 하나는 그의 동료 이름을 따서 아그립바로 명명했다. 곳 곳 마다 요새를 건축했으며, 사마리아에 요새를 건축하여 옥타비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세바스테” 라고 명명했다. 헤롯은 성전을 다시 건축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이 건축되면 메시야가 오심으로 메시야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헤롯 성전에 들리셨다. 

 

(2) 대제사장 임명 

 헤롯은 다윗의 왕조의 후손도 아니고 하스모니아 왕조의 후손도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거부했다. 헤롯은 반항하는 백성들을 폭력으로 압박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스모니아 왕가를 모두 살해했으며, 헤롯 주변에 세 여인, 그의 여동생 살로메와 하스모니아 왕가의 여인 마리암네, 그녀의 어미(장모)알렉산드리아가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 질투와 시기와 거짓 증거, 음모를 꾸밈으로 헤롯의 가정은 항상 암투와 살인극이 끊이지 않았다.  

 헤롯이 대제사장을 임명했는데, 헤롯은 외국의 거주 유대인들의 동향 때문에 요한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하고 싶었지만 신체의 결함 때문에 율법에 저촉되므로, 그 대신 바벨론 거주 아론의 후손 아나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헤롯의 장모는 그녀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Ⅲ세를 대제사장으로 하도록 천거했는데, 헤롯이 거절하므로서 그의 장모 알렉산드리아가 애굽 여왕 크레오파트라에게 서신을 보내 마크 안토니로 하여금 아나넬을 해임하고 아들 아리스토블루스Ⅲ세를 임명해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헤롯은 장모의 처사에 불쾌감을 가졌지만 마크 안토니의 요청이 있자 아나넬을 해임할 수 밖에 없었고, 율법은 30세 이상 되어야 대제사장직을 맡을 수 있지만 당년 17세의 아리스토블루스Ⅲ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버린 것이다. 송형철에 의하면, 점차 아리스토블루스Ⅲ세가 유명해지자 헤롯은 질투하기 시작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아리스토블루스Ⅲ세를 왕으로 세우고 헤롯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는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 아리스토블루스Ⅲ세를 살해할 계략을 꾸며, 연회장에 있던 아리스토블루스Ⅲ세를 익사시켰다고 한다. 

 

(3) 헤롯의 가정 파탄 

 탈무드에 의하면 이두매 사람(에서의 후손)은 하스모니아 왕가의 종으로 종사해야 한다. 그런데, 힐카누스 대제사장은 이두매 사람 헤롯을 유다 총독으로 마크 안토니에게 천거했고, 손녀 마리암네를 헤롯과 결혼시키도록 해주었다.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이 자기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일일 것이다. 헤롯이 유다의 권력을 장악할 당시 하스모니아 왕가에는 왕위를 계승하여 계대에 따라 위에 앉을 자가 없었고, 홀로 마리암네 만 남아있는 실정이었다. 헤롯이 하스모니아 왕가의 딸 마리암네와 결혼함으로서 합법적인 왕위 계승권을 가지려 했다는 것이다. 헤롯은 왕위를 보존하고 있었으나 가정은 파탄했다. 그는 그의 처 마리암네와 장모 알렉산드리아에게서 그를 적대시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의 아들의 죽음이 헤롯의 지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친족들은 마리암네를 모함했는데, “마리암네가 헤롯을 독살하려고 계략을 세웠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마리암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헤롯은 배신에 충격에 빠졌고, 그녀를 처형하고 말았다.  

  

. 헤롯 안디바 ∼ 헤롯 아그립바 Ⅱ세 

 

 헤롯은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아예 왕위를 셋으로 구분하여 본분왕으로 나누어버렸다. 헤롯 안디바는 갈리리,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 아칼레오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  빌립Ⅱ세는 이두레,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했다. 그 중에서 헤롯 아칼레오과 헤롯 빌립Ⅱ세는 당 대에서 끝났고, 헤롯 안디바는 3대를 이어서 자리를 물려주는데, 헤롯 아그립바Ⅰ세는 헤롯의 손자로서 어머니가 마리암네였다. 그는 아버지 헤롯 안디바가 로마에 반역을 일으켰다고 가이사 황제에게 밀고하여 왕위 자리를 박탈 당하였고, 자신이 분봉왕이 되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Ⅱ세가 분봉왕이 되는데, 마지막 분봉왕이었다. 

 

.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성 파괴와 이스라엘 멸망 

 

폼페이 장군의 아시아 지역 통치 이후 로마는 총독부를 시리아 안디옥에 두고 총독 산하에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며 각 지역 나라의 지방총독, 행정장관, , 분봉왕을 관장하고 있었다. 로마 통치에 대한 반란이 계속 이어졌고, 그 중 가장 심했던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란의 주된 이유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유대인 회당에 인접한 헬라인과 분규가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헬라인의 대지를 고가의 금액으로 주고 양도를 받기로 했는데, 헬라인이 나중에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헬라인은 거절하고는 그 곳에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결국 싸움이 벌어졌는데, 프로루스 총독이 싸움을 말리려 했다. 유대인들은 총독에게 뇌물을 주면서 건축 중단을 요구했는데, 약속을 해놓고는 총독은 다른 데로 가버렸다. 이에 헬라인들이 조롱했고, 유대인들은 격분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돌아온 프로루스 총독에게 항의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오히려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돈이 필요하니 성전 금고에서 17 탈란트를 요구해온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이 소란을 내었으며, 각 가정마다 바구니를 돌려 헌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프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야유를 하고 모욕을 주니 총독은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총독은 대제사장을 소집하고, 그리고 군사들을 풀어서 예루살렘의 시민을 살해하도록 했다. 역사가 요세푸스 증언에 의하면 당시 3,60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Ⅱ세는 애굽으로 도망가 버렷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열심 당원들이 로마군의 무기고를 탈취하였고, 결국 시리아의 총독이 개입하게 되었다. 유대 반란군의 저항은 생각보다 강하여 시리아 갈루스 총독은 패하고 말았다. 반란군은 이스라엘을 장악해버렸는데, 이후 시리아 총독은 로마의 개입을 요청했고, 드디어 로마제국의 가이사 황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투입시킨다. 2년간 반란군의 저항이 있었으며, 결국 이에 요세푸스를 포함하여 유대인이 약 6000명 가량 체포되었고, 베스파시안 장군의 아들 티토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훼손되고 이스라엘은 함락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후 화염에 휩싸였으며, 붕괴되고 말았다.  

 

. 백성들의 고난과 메시야에 대한 희망 

 

1. 백성들의 고난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고 남 유다 왕국은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차에 걸쳐서 유배를 당하는 참사를 겪는다. 블레킨솝에 의하면, 바벨론 제국은 유배 집단이 나름의 독립된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하고, 어떤 경우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이로서 쉽게 정체성을 견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유배자들이 디아스포라의 주된 중심지 중의 하나인 가시뱌에 성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라 시대에는 잇도라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에스라는 이 사람의 도움으로 성전 요원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항은 역사적인 것에 근거하지 않고, 추론에 근거하기 때문에 잠정적 성격을 갖는다. 바벨론 제국 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까지 70년 기간은 이스라엘로서는 완전히 폐허가 되는 기간이었으며,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다. 오직 유배 지역에서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말씀만이 백성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페르시아 제국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국가가 망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불안했는데,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계속했으며, 국가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사라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심판의 날을 주시겠다고 경고했다. 

 그 당시 유배되었던 유대인들은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부푼 꿈을 안고 귀환하였으며, 선지자 스가랴, 학개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그들을 성전을 재건했다. 성전은 바벨론이 무너뜨린 그 성전에 비길 수는 없지만 장차 더 큰 영광이 임하리라는 예언으로 감동받아 지어진 교회였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 임하리라던 그 큰 영광이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은 소망과 기대는 희미해지기 시작했으며, 선지자들이 약속했던 그 번영이 돌아오기는 커녕, 하루 하루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기근과 흉작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 사랑의 공의로운 통치에 회의와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를 선하다고 까지 말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준행하며,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였다.  

 

2. 유대 공동체 결성 

 

바벨론이 멸망하고, 고레스 황제는 유대인 공동체 재건의 칙령을 공포했다. 재건 사업의 초기는 실망을 금치못했고, 좌절과 낙심을 가져왔다. 현실은 이사야의 약속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귀환 후의 유대인 공동체는 극히 작은 규모였다. 브라이트에 의하면 거의 2만 명을 넘지못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새로 돌아온 자들은 역경과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렸기 때문에 공동체의 사기는 위태로울 정도로 저하되었다.(이사야55-66) 

 새로운 공동체는 선지자의 이상대로 되살아 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주변의 환경 여건 때문에 경건하지 못했고, 비정함을 은폐시키는 겉치례와 혼합주의 종교가 횡행했다. 초기 유대인 공동체는 선지자들의 숭고한 이상에 감동되어 선조들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하자는 한 무리, 이교적 환경에서 많은 것들을 흡수한 대부분의 귀환 포로들, 두 무리가 공존했던 것이다.  

 성전의 완공은 유대인들에게 집회의 장소를 마련해 주었는데, 예배 공동체로서 그 지위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공동체 내부의 도덕적 기풍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말라기) 또한 이방 종족과 통혼은 계속되었고, 여기에는 많은 지도층 시민들과 성직자, 평신도들이 모두 깊히 관여하였다. 에스라는 율법을 토대로 한 공동체의 재건을 모색하게 된다. 

 이방 종족과의 통혼 문제가 처리되자 백성들은 모여 엄숙히 죄를 고백했고, 그런 후에 율법에 따라 살기를 언약했다.(9:38, 10:29). 특히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않고,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으며, 칠년 마다 땅을 묵히고, 채무 환수를 포기하겠다는 서약을 했다.(10:30-39) 또한 성소의 유지를 위해 매년 세금을 부담하고, 제단에 쓰일 나무, 십일조의 율법을 규정대로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에스라의 개혁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공동체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는데, 성전의 재건이 유대인들에게 포로생활의 과도기 이후 집회 장소와 제의 공동체로서 그 지위를 마련해 주었지만, 이전의 국가제도를 부활시킬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었고, 또 그렇게 될 희망도 없었다. 지파 동맹 시대의 전통들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지파의 동맹 체제로 되돌릴 수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포로기 이전의 공식적인 전승들을 보존하고 있는 제사장 법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왔다. 이 전승들은 포로 생활 중에도 계속 전해지고 수집되다가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스라에 의해 오경이 완성되어 체계화되었고, 그것을 신앙과 생활의 실천 규범 준칙으로서 유대인의 공동체에 부과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율법은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의 엄숙한 언약을 통해 받아들여졌고, 이렇게 하여 유대인 공동체의 헌법이 되었다. 율법은 페르시아 정부의 재가를 얻었지만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지위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페르시아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스스로 내정 문제들을 규율하는 것이 허용된 공인된 공동체를 형성했다.  

 유대인 공동체가 하나의 성문법을 토대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성문화한 율법은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하나의 법전이 공식적으로 규범적인 지위를 차지한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에스라의 개혁은 요시아왕의 개혁을 따르기는 했지만 에스라의 율법은 그 성격이 분명하게 규정된 구성적 요소의 역할을 했다. 공동체 전체 생활은 그 율법에 토대를 두었고, 또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최고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에스라의 모세오경은 최고의 율법으로 간주되었고, 오경과 율법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동일시되고,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졌다.  

                      

3. 메시야 운동 

 

 헬라제국 시대에 들어와서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게 되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표출되다가 로마가 통치하던 마지막 2세기 동안에는 절정에 달했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에는 민족주의적이고 제왕 중심적인 메시야 운동이 있었다. 고레스가 등극하기 이전에 이 운동은 유배당한 여호야긴왕에게 집중되면서 시간이 지나 스룹바벨이라는 자에게 옮겨갔다. 이 운동이 성전과 성읍의 재건 계획과 밀접히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어진 여러 단계에서 희망과 탈환 상이 거듭 뒤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국 귀환에 대한 기대, 성전 기초 석을 놓는 일, 다리우스에 대한 반란이 있는 동안 성전 재건 사역이 재개된 일, 수년 후의 작업 완성 등 이었다.  

 메시아 운동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더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 시대 초기의 유다의 사회적 조건들이 일반적으로 좋지 못했으며, 때로 재앙스럽기 까지 했다. 로마 치하에 일어난 메시아 운동은 다윗 가문의 통치자 아래 다시 독립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무장 봉기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하나님이 개입하리라는 믿음으로 그런 직접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개입은 율법을 준수하고, 예배를 정화하며, 회개 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4:6, 9:9-10)  

 

 하나님의 권능과 사람들과의 언약 

 

1. 사람들 속에서 권능의 모양 

 

. 성전의 재건 

 

 솔로몬왕 때 건축한 성전은 바벨론 제국의 침략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훼손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던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에스라1:1-4) 

 고레스 황제의 포고령이 내리자, 유대인 일부는 성전 기명을 가지고 귀환 길에 올랐는데, 49,897명이었다. 유대인은 고레스왕의 조서에 따라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고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운하여 건축 작업을 예비했다.(에스라3:7) 다음해 2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기초를 놓았고, 백성은 성전 건축 역사에 참여했다. 당시 노인들은 첫 솔로몬 성전을 보았기 때문에 성전의 지대가 놓임을 보고 감개무량하여 대성 통곡하고, 젊은이들은 기쁜 함성을 올렸다(에스라3:8-13) 

 제사장 여호수아는 바벨론에 유배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이다. 그들의 이름이 역대기와 학개서에는 여호사닥과 그의 아들 여호수아로 기록되어 있다.(대상6:14, 학개1:1) 성전공사 진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귀환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에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이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함께 공사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에스라4:2-10) 그들은 앗시리아 제국 통치 당시 사르곤, 에살핫돈, 앗술바니팔왕의 정책에 따라서 타 지방에서 팔레스타인에 이주하여 북 이스라엘 나머지 백성과 혼혈된 민족으로서, 우상과 하나님을 혼합 숭배하고 있었다.(왕하17:34) 총독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페르시아 방백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유대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에스라4:4-5) 유대인들 상호 마찰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은 생계 때문에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학개1:3-11)  

 고레스 황제는 바벨론 총독을 캄비세스에게 임명했으며, 주전 530년 고레스 황제가 죽자 캄비세스 총독이 페르시아 황제가 되었다. 캄비세스 황제의 기간 중에도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개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성전건축 공사는 주전 520년에 이르기까지 중단되어 있다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충고로 유대인들은 공사를 재개하기 시작하였다.(학개1:8)(스가랴5:1) 그러자 또 다시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강 서편 총독 닷드네와 페르시아 제국 관리 스달-보스네 및 그들의 동료였다.  

 다리오 대왕은 지난날 고레스 황제의 조서를 서고에서 찾아 그 내용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유대인의 귀환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도록 명한 것과 또한 왕실 재정에서 비용을 부담할 것을 확인했다. 왕은 강 서편 총독과 방해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 성전공사를 막지말고 멀리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왕의 재산에서 그 경비를 유대인에게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지원하도록” 조서를 내렸다.(에스라6:1-15)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성전건축 공사는 또 다시 재개되어, 바벨론에서 포로들이 돌아온 지 18년이 지났을 때, 성전 재개로부터 대략 4년 후에 성전이 완공되었지만, 로마의 지배 하에 티토 장군의 공격을 받고, 성전은 다시 훼손되고 말았다.  

 

.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 

 

(1) 메시야에 대한 예언 

 

① 선지자 미가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 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가4:1-3)  

 화인버그에 의하면, “끝날에” 라는 표현은 메시아 시대뿐만 아니라 메시아 시대를 영접하는 시기까지를 언급하는 것이며, 메시야의 장엄하고 복된 왕국은 세상의 모든 통치와 지배를 초월할 것이라고 했다. 시온은 세상에 대한 통치의 중심인 동시에 영적 중심이 된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백성, 모든 민족들이 메시아 왕국 중심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올 것이다. 이 움직임은 자발적인 것으로 구속된 민족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날 것이다. 

 

②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경축과 찬양이 있게 될 것을 말했다. 심판의 날은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사건을 가져오지만, 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해와 달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시점에서는 하나님은 백성과 교제의 관계를 확립하실 것이며, 백성들을 위로하실 것이며, 백성들의 대적을 제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전혀 보지못했던 잔치를 백성을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의 현실과 다가올 예언의 성취를 비교하면서 설명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어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으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리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9:1-2)  

 베이어에 의하면, 여기에서 해변 길은 대부분 지중해 해안을 따라 Levant(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같은 연안국가들)에서부터 이집트로 뻗은 고대의 대로 시스템을 말하는데 사용되었다. “요단저편”은 갈릴리 바다 위 아래 요단강 동편지역에는 Decapolis가 있었고 이 지역은 먼저는 셀루우크스 왕조 하에, 나중에는 로마 통치하에 있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의 비 유대적 인구 구성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방의 갈릴리”는 레반트지역과 이집트를 연결하고 있었던 갈릴리의 복잡한 도로 시스템으로 이방 영향의 유입과 함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좀 더 많은 상호작용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이방의 갈릴리는 그 지역의 인종적 구성과 또 어느 정도는 영적 실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대변해 준다.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이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9:6-7)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2:2-4)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중 이 부분은 선지자 미가의 예언과 거의 같다.  

 

③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 스가랴는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악행을 회개하도록 제시한다. 선지자 스가랴에게 나타난 8가지의 환상은 회개와 회복을 나타낸다. 첫째, 화석류 사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자가 세상을 두루 다니는 것을 보여준다. 밤에 빨간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에 서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 뒤에 말 세 마리가 뒤따라 왔는데, 붉은 말과 아롱진 말, 흰말이 함께 있었다. 이 뜻을 선지자 스가랴가 묻자 “이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인데 세상을 정탐하고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며, 땅이 평안하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천사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노하신지 70년이 되었는데, 백성의 죄로 인해 여러 나라를 동원하여 깨닫게 해주려고 했는데, 여러 나라들이 심하게 내 백성을 괴롭히므로 불쌍히 여겨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루살렘이 건축된다. 먹줄이 치어진다. 성읍을 풍부하게 하시며, 예루살렘은 다시 택함을 받을 것이다.(1:17-17)  

 화석류 나무에 서있는 자와 4마리의 말에 대해서 이학재에 의하면, 많은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중보자를 나타낸다고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환상은 백성들의 포로 생활에서 다시 회복을 약속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번 째, 네 뿔과 네 공장의 환상인데, 이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고 있다. 네 뿔은 이스라엘을 해친 뿔이다. 이 네 뿔을 네 공장에서 뿔을 꺽어버리는 것을 보여준다. 이 네 뿔은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이다. “뿔들이 유다를 해쳐,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고, 뿔들을 들어서 뿔들을 떨어뜨리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네 공장 역시 서로 다른 나라를 치는 메데,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로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심과 회복을 위해 행하신다는 확신을 주시는 말씀이다.  

 세번 째 환상은 측량 줄을 잡은 사람이다. 한 측량 줄을 잡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이 나타난다. 측량 줄을 잡고 가는 사람은 천사 일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불 성벽이라고 했는데, 영광의 새로운 예루살렘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만든 예루살렘의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바벨론 성에서 모두 피하도록 하고,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백성을 흩어시지만 결국 이것이 이방 민족에게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네번 째, 제사장의 정결한 옷의 환상인데 “대제사장 여호수아(모세시대의 여호수아와 동명이인)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대적하는 것을 보여준다”(3:1)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 다가 올 영적 지도자를 나타낸다. 여호와는 사탄을 책망하고 천사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갈아입기를 명령한다.  

 그리고 선지자 스가랴가 중간에 갑자기 끼어들어 “정결한 관을 씌어달라”고 하자 대제사장은 정결한 관과 옷을 입는다. 여호와의 천사는 여호수아가 성전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내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3:8-9)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은 백성들의 죄이고 이를 대신하는 것이 대제사장이다.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책망한다. 더러운 옷을 갈아입는 것은 죄를 사하여주는 것이다. 정결한 관과 옷을 입는 것은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새롭게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조건을 말한다. “나의 길을 걸으며” “나의 명령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다. 이 조건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 “하나님의 뜰을 맡길 것” “하나님께 자유롭게 왕래할 것”이라고 한다. ,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장이 대신 들어갔으며,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갔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누구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의 글에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3:9)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라 할 수 있다. 돌의 일곱 눈은 성령충만한 모습일 것이다.  

 다섯번 째, 순금 등대, 두 감람나무(올리브나무)의 환상인데, 스가랴가 본 것을 천사에게 묻자, “그가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 스룹바벨 총독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올리브나무 두 가지이며, 기름부음 받은 자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 환상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두 감람나무로 상징했던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그들의 사명인 성전을 재건축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며, 오직 여호와의 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금등대는 오늘날 교회이며, 성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스룹바벨의 총독직과 여호수아의 제사장을 합하면 왕적 제사장이 되는데, 이것의 상징은 마이켈슨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의 백성들에게 부어질 때인 기독교 교회의 오순절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유대인들의 회복시대를 넘어서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여섯번 째, 날아가는 두루마리인데, 두루마리는 말려있지 않고 펼쳐져서 날라간다. 이 두루마리의 크기가 주어진다. 큰 두루마리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 크기는 제사장들이 율법을 읽었던 장소인 낭실의 크기와 동일하였다.(왕상6:3) 두루마리에는 두 가지가 적혀있는데,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인데, 도적질하는 자는 끊어지고, 거짓 맹세하는 자는 끊어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언약을 파하고, 불순종하고, 말씀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발하리니 도적의 집에 들어가며, 내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니”라고 쓰여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일곱번 째, 큰 통에 앉아있는 환상이다. 한 여인이 큰 통에 앉아있고, 뚜껑에 납 한 조각이 있는데, 그 납이 들리면서 “이것은 악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다시 큰 통에 넣어버리고 덮어버리는 환상이다. 그런데 큰 통에서 두 여인이 나오고, 황새가 나와서 통을 들고 통째로 시날땅으로 가는 환상이다. 여인은 백성들의 죄악을 의인화 한 것으로서 이 두 여인은 악의 대행자로서 신적인 대행자였다.(11:19), 황새는 가증한 동물이다. 더러운 통속의 죄악을 통째로 들어서 시날 땅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에바 여인은 요한계시록 17 3-5절의 음녀와 같은 의미다.  

 여덟번 째 환상은 온 세상에 심판을 하러 나가는 네 개의 병거이다. 이 네 병거는 두 산에서 나오는데, 이 산은 놋산이다. 놋산은 솔로몬 성전 입구 좌우에 세워진 8.1 미터의 높이와 5.4 미터 둘레의 놋으로 된 기둥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 성전의 큰 기둥 중 하나의 이름이 “야킨”으로 “그가 세운다”라는 의미인데, 또 하나는 “보아스”라고 해서 “그안에 힘이 있다”라는 의미이다. 기둥은 하나님의 왕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네 병거는 네 영들이라고 해석하는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말해준다. 네 병거는 붉은 말, 검은 말, 흰말, 얼룩진 말이다. 이것은 세상으로 나가는 네 영들이다. 우주적인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대행자의 모습이다. 환상이 끝나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관을 씌우는 명령과 관을 여호와의 성전에 두는 명령이 나타난다.  

 스가랴 9 9-10절은 메시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9:9-10) 실제로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성취되었다.(21:1-9) 

 

④ 선지자 아모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컷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9:11-12) 마지막 때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하게 되는데, 가장 가까운 민족 에돔에서 가장 먼 곳의 기업이 하나님을 통해서 기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⑤ 선지자 호세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찢어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며,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사흘 만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니 우리가 여호와의 앞에서 살 것이다.(호세아6:1-2) 이 부분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⑥ 선지자 다니엘 

 선지자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는데, 다니엘이 그 이유를 깨달았으며, 이 모든 결과는 백성들의 죄악때문이고, 심판을 받게되었다. 그리고 회복을 간구한다. 다니엘의 기도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주전 539)로 말하고 있다.  

다니엘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패역했으며,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오니 큰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환상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으며, 환상을 깨달아라” 라고 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기름부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다니엘9:24-26)  

 여기에서 칠십 이레에 대해서 이학재에 의하면, 학자들은 4가지 해석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으로 기름부은 자는 안티오쿠스Ⅳ세를 의미하며, “중건하라는 영이 나올 때”를 기준으로 할 때, 주전 605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70 이레는 70 X 7 = 490 년을 의미하는데, 각각 7이레+62이레+1이레에서 먼저 7이레는 49년 간으로 포로에서 귀환하는 기간, 62 이레는 434년 간으로서 오니야Ⅲ세까지, 나머지 1이레는 7년간으로서, 안티우쿠스Ⅳ세의 핍박 전반기까지이다. 실제로 안티우쿠스Ⅳ세는 주전 167년에 제우스 신상을 성전에 세웠다.  

 이학재에 의하면,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재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7이레는 에스라 귀환까지나 느헤미야까지, 62이레는 주전 434년에서 A.D. 26년 예수님 세례 때나 종려 일로 보며, 1이레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본다.  

 두 번째는 상징적인 해석으로서 예수님의 초림에 맞추는데, 7이레는 고레스 칙령부터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까지, 62이레는 주전 400년에서 그리스도 초림까지, 1이레는 초림 A.D. 70년까지로 해석한다. 

 상징적인 또 하나의 방법은 재림에 초첨을 맞추는 것으로 7이레는 고레스부터 그리스도 초림까지이며, 62이레는 그리스도 고난부터 마지막 적그리스도까지이며, 1이레는 마지막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⑦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에스겔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말한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같더라”(1:26)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9:4-6) 이학재에 의하면, 이 내용에서 이마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 표를 받은 무리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연관되어 진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요한계시록7:3)에서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꺽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17:22-23) 이학재에 의하면, 이 내용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는 내용인데 선지자 에스겔이 말한 위의 세 가지 말씀에 대해서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로 말하고 있다.  

 

(2) 성경 책  

 에스라에 의한 율법의 정경화는 유대인에게 옛 이스라엘이 알고 있었던 것들보다도 훨씬 절대적이고, 유형적인 규범을 부여했다. 브라이트에 의하면, 에스라의 개혁 후 완전한 모세오경이 예루살렘 사회에 알려졌는데, 이것은 최고의 율법으로 간주되었으며, 오경과 율법이 유대인 공동체에 동일시 되었고,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 들여졌으며, 오경의 정경화에 뒤이어 나머지 책들도 정경화가 되었다. 여호수아서로부터 열왕기까지 역사서들은 신명기와 함께 모세로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단일 저작 집을 이루었는데, 이 책들에 예언서들이 첨가되어 유대인 성경의 두 번째 큰 범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성서의 정경화는 절대적이고 유형적인 규범을 부여했는데, 하나님의 계명들이 단번에 영원한 유효성을 지닌 채 율법 안에 천명되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통해 결정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다른 수단들은 밀려나거나 억압되었다. 이것은 예언이 사라지게 된 이유이다.   

 율법을 높힘으로서 새로운 제도의 하나가 성전 및 그 제의와 병행하는 공공 예배 장소의 회당이었는데, 회당은 성전보다 더 오래 존속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이 거리가 멀어서 성전 제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그런데도 지방 제의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도의 발전은 불가피했다. 율법이 정경으로 지위를 얻게 됨에 따라 각 지방에서 사람들이 그 해설을 듣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는데, 율법 봉독과 강해가 그 중심이었던 안식일의 정규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서, 점차 조직적인 회당이 생기게 된 것이다. 율법의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자 그 올바른 해석과 적용에 대한 중요성도 점차 부각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경의 표준판이 존재하지 않았다. 율법을 실제로 생활 전체에 적용하기 위하여 율법에 대한 더욱 자세한 정의와 해석을 위한 해석학적 원칙이 발전되어야 했다.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율법 연구에 몰두하고, 자신의 학식을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 서기관이라는 계층이 등장한 것이다. 벤시라는 제자 집단을 거느린 서기관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방대한 구전 율법은 후대에 생겼지만 부주의하여 율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율법 둘레에 “울타리”를 치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성경은 성경에 비추어 설명되었고, 성경의 명령들은 자세하게 정의되기도 했다.  

 율법에 대한 열심과 함께 선한 삶과 행실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도 깊어졌는데, 그것은 지혜문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브라이트에 의하면, 지혜 문학이 포로기 이후에 대중적이 되었고, 유대교의 출현시기에는 선한 삶의 특성을 제시하는 문헌들이 많이 나왔다. 유대인 교사들은 지혜의 전승을 개작하여 “율법아래서의” 선한 삶을 묘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제로 지혜와 율법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세세한 면까지 지켜야 하는데, 이와 같이 세세한 점까지 강조했으므로 전체적인 시야를 잃어버리고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이 똑같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하찮은 것들과 좀 더 중요한 것을 똑같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율법을 어기는 것은 무엇이나 중대한 것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마카비 투쟁 이후 B.C. 2세기경 유대교는 결정체가 되기 시작하여 그 후 신약시대까지 지속될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율법아래에서 유대교는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유대인 공동체 안에 자리 잡았던 여러 종파들은 이러한 의견 불일치를 보였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등장이다. 사두개파는 보수주의자들로 자처했는데, 그들은 토라의 권위만을 인정했고, 서기관들에 의해 발전된 일단의 구전 율법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부활 신앙, 사후의 상벌, 마귀론, 천사론, 묵시 문학적,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거부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합법적으로 인정된 제사장 단의 감독 하에 성전 제의를 거행하고, 율법가운데서도 특히 의식과 제물 봉헌에 관한 규정들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  

 이에 반대되는 집단이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율법에 대해서 열심을 내고, 헬레니즘과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던 집단인 마카비 시대의 하시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바리새파는 하시딤파와 마찬가지로 율법 준수에서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그들은 속된 하스모니아 왕들의 정책에 거의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왕들과 관계는 대체로 긴장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진지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도 널리 존경받았다. 실제로 그들은 유대교의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되어 유대교의 기조를 잡아갔다. 그들은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사두개파보다 더 엄격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다른 부분을 토라와 함께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한 성문 율법을 해석하기 위하여 발전된 구전 율법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을 통해 구전 율법은 전승되었고, 확대되어 가다가 미쉬나로 편찬되었다.(A.D. 200년경) 그리고 탈무드로 집대성 되었다. 바리새파는 부활을 받아들였고, 이와 비슷한 교의들도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대교의 활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대체로 과격한 행동을 하는데, 신중했다.  

 유대교의 활로는 호전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는데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열심당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광적으로 무모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러 오실 것을 확신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강적에 대해서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당파였다. 열심당은 율법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바리새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민족의 활로가 단지 율법을 지키면서 기다리는 데 있다는 것에 달가워하지 않았다.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긴장 속에서 살았던 엣세네파 같은 종파들도 있었는데, 사해 두루마리들이 출토된 바 있는 쿰란 종파는 엣세네파였다. 엣세네파는 하스모니아 왕조의 대제사장을 겸한 왕들에 대해서는 화해의 여지가 없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 이 종파의 세력 배경은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하스모니아 왕족들의 제사장직은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 제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유대 광야로 나가 은둔생활을 했다.  

 구약시대 말기에는 히브리어를 그 당시 아람어로 번역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했는데, 성경해석 학파(힐레학파, 샴마이학파)의 등장이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도 다양한 형태(문학적양식, 내용적양식)의 해석이 도입되었다. 문학적 양식(미드라쉬와 미쉬나)의 한 해석방법으로 미드라쉬는 민수기, 신명기 등 구약성경의 경전적, 설교적인 주석으로, 그리고 미쉬나는 주제들이 신학적이지 않는 축제, 절기, 여자들, 성스러운 것들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내용적 양식으로서 할라카와 하카다가 있었는데, 할라카는 주로 법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카다는 비법적인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주석 외에도 탈무드가 해석에 등장했으며, 이후 해석할 사항들이 많아지자 미쉬나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졌으며, 그것들을 해석하는 해석자들의 모임(아모라임)과 그들이 창출한 미쉬나를 보완한 주석(게마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70인역의 구약성경이 등장하였고, 유대인들은 주전 약 250-150년 사이에 히브리어의 각종 경전을 번역하고 체계화시켰다. 이 시대에 대표적인 풍류적 해석자는 Philo였다. 이후 초대 기독교 교부시대에는 이그나티우스, 마르키온, 저스틴 마터 등의 학자들이 있었으나, 이레니우스라는 학자에 의해 그의 표준적 해석이 교회에서 채택되고, 교회가 성경의 권위적 해석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생겨났는데, 오리겐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리겐은 풍유적 해석을 호의적으로 받아드리고, 삼중적 의미의 해석도 시도했다. 그리고 이후 안디옥 학파가 등장했는데, 이 학파는 역사적 해석을 강조했으며, 4-5세기에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문제에 대한 정통주의를 벗어나는 해석을 했다고 비판을 받으면서 사라져버렸다.  

 4-5세기에는 제롬과 어거스틴이 등장하였으며, 제롬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했으며, 초기에는 풍유적 해석을 환영했지만 나중에는 문자적 의미의 해석을 강조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풍유적 해석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이 성경해석에 지배적인 시기가 시작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사중적 의미의 해석(문자, 풍유, 도덕, 신비)을 시도했는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 리라 니콜라스 등의 학자들이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 등장하는데, 마틴 루터는 풍유적 해석에 불만을 가졌으며, 문자적, 문법적 의미와 영적 심층의미간의 균형을 맞춘다. 존 칼빈은 문법적, 역사적으로 성경해석을 시도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파스칼이 등장하는데, 그는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천명하면서, 단순한 신의 추상성에 반대하고, 하나님을 느끼고, 의식하고, 경험하는 마음을 강조했다. 이후 17-18세기는 성경의 원문을 결정하는데 진보가 있었으며, 신약성경 사본 분류,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문법서, 어휘사전 등이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진보가 이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철학적 전제들이 광범위하게 지지받게 되었으며, 과거 대부분의 성경 연구는 교회가 주도하는 신학교 주변에서 수행했지만, 많은 연구가 독일을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세기 많은 탐구자들이 자신들의 기초를 고려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간과하는 실수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후 변증법적인 대립이라는 헤겔주의의 등장으로 역사 비평의 선입견들이 나타났으며, 벨 하우젠 같은 문서가설도 등장하게 된다. 많은 적대세력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 좋은 주석들이 나왔으며, 문법, 사전 편집 등으로 역사적 배경, 메시지 등 특수한 진리들이 조화되어 나갔다. 그러나 20세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문법, 문학비평, 역사적 평행사실 등에 대한 연구 및 주석이 등장하였으나 신학을 기피하였고, 역사적, 고대 연구적, 언어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연구가 활발해졌다. 결국 하나님은 해석자에게 추상적 이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1959년에 로빈슨이 “새로운 역사적 연구 탐구”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면서부터 성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평신도를 위한 주석들도 산출되게 되었다. 마이켈슨에 의하면, 성경은 종교의 신학적 믿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역사 속에서 만나고,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 영적 균형을 통해서 의미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지혜 

욥기는 누가 언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된 후 귀환시대에 증가하기 시작한 지혜문학의 영향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욥기의 첫 장면은 하늘을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그 사탄” 즉 고소자는 하나님을 알현하고 하나님이 모범적인 사람, 흠없는 성인으로 간주하는 욥에 관한 내기를 제안한다.  

 사탄은 즉시 일에 착수하는데, 자식을 포함한 욥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러나 지혜자 욥은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내 모친의 태에서 나는 벌거벗고 나왔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돌아갈 것이다. 주시는 이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시는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로다.(1:21)  

 실망한 사탄은 하나님께 돌아가 내기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만약 욥의 몸에 고통을 준다면 그는 덜 철학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탄의 요구를 허락하시나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하셨다.(2:6) 사탄은 욥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혐오스런 욕창이 생기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욥은 무너지지 않았다.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소”라고 하면서 죄를 짓지않았다.(2:10) 이 모든 것이 욥기의 본론인 욥과 세 위로자 사이의 변론이다.  

 욥은 위로 받기를 거부한다.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이 되면 처음에는 위로받기를 거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야곱의 아들들이 그의 아들 요셉이 야생동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왔을 때 야곱은 “그의 모든 아들들과 딸들이 일어나 위로했으나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애곡하며, 내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가겠다고 하고 그를 위하여 울었다”(37:34-35)  

 욥을 방문한자는 가족이 아니라 동료성인이었다. 이 친구들과 대화는 학문적이다. 그들은 지혜를 가르치는 교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은 위로받기를 거부하면서 지혜의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욥이 한탄했을 때 동료들은 욥이 자신이 가르쳐온 지혜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고 정중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욥은 지혜의 규범을 거부한다. 욥은 “이럴리 없어”라고 반복하게 된다. 욥은 드디어 신적 정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자를 축복하고 악인을 벌해야 하는데, 누구든지 눈이 있다면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것이다.(13:1-19)  

 “어찌하여 악인들이 살아서 장수하며, 그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에게서 떠나소서, 우리는 주님의 길을 알고싶지 않습니다.” 하는구나........ 보아라, 그들의 번영이 그들의 손에 있지 않으니 악인들의 생각은 내 생각과 거리가 멀다. 악인의 등불이 꺼지고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그들을 멸망케하심이 몇 번이가, ......어떤 사람은 기력이 정정한 채 조용하고 평안하게 죽으니, 그의 그릇들은 젖으로 가득하고, 그의 뼈들은 윤택하다.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으니 복이라고는 맛본 적이 없다. 이 둘이 다 흙속에 누우면 구더기가 그들 위를 덮을 것이다”(21:7-26) 이 말은 정통지혜가 맞는 것처럼 보이나 욥은 그들의 주장에 일 일이 논박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욥에게 “폭풍가운데” 말씀하시면서 극적인 결말이 찾아오는데, 하나님은 “욥 너는 하나도 모른다. 너는 세계의 큰 운영 원리에 대해서 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계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았다면 말하여라, 죽음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네가 사망의 그늘진 문을 보았느냐, 네가 땅의 넓이를 짐작할 수 있겠느냐, 다 알고 있다면 말해보아라 ...... 알 것이다. 이는 네가 그때에 태어나 너의 날수가 많기 때문이다.(38:4-7, 17-21) 존 비비어는 우리의 경험, 다른 사람들의 의견, 하나님에 대한 선입견 따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걸러낼 때에 우리가 하는 일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그 이치를 누릴 수 없게한다. 사실상 우리는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그토록 노하셨던 것이고, 오늘 날에도 우리가 그 분의 길을 잘못 대변할 때에 그렇게 노하신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못하게 사람들을 막는다.  

 욥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하나님에게 둘려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3:23),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버릴 것이라”(6:9),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킨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22:24)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하나님”(27:1) 등의 말을 하게되었고, 결국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게된다.  

 하나님의 꾸지람(38-41)에 대해서 욥은 회개했다.“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이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욥은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보소서 저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겠습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 눈으로 주를 보옵니다.”라고 말했다.  

 성경은 우리가 주께 대하여 들을 때가 아니라 주를 볼 때에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된다고 말한다.(고후3:18) 그 분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이것이 곧 계시된 진리가 한 인간에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러나 깨닫기까지는 변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는 “알겠습니다” 라고 외치며, 그 순간 우리는 깨닫고, 더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된다. 곧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을 이전의 축복된 상태를 회복시켜주신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지식은 제한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욥은 의인이었다. 에스겔 14 14절에 보면 “비록 노아, 다니엘, ,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2. 백성들의 죄악과 하나님과의 언약 

 

. 백성들의 죄악 

 

당시 선지자들에 의하면 백성들의 불신앙, 이방인과의 통혼, 제사장과 지도자들의 타락 등이었다. 선지자 요엘이 말하고 있는 것 중에서, 취하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농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선지자 말라기는 제사장들의 잘못된 제물, 형식적인 예배, 십일조와 헌금, 헌물에 대한 잘못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시드기야왕 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도덕적으로는 수준이 낮고, 백성들에게는 잘못된 소망과 약속을 한다고 했다.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대중 인기를 찾는 자로 평안을 선포하고, “엄중한 말씀”이라는 선지자들의 말씀을 권위있는 말씀처럼 표절하였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백성을 미혹하였다.(23:9-24:10)  

 선지자 에스겔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그들은 영적인 행음자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으며, 자신의 죄를 조상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조상들이 한 것 같이 영적 음행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6:1-14, 8:5-17, 16:15-22, 20:30-31).  

 

.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1) 선지자 요엘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심판의 날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늙은 자들아,...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요엘1:1-4)  

 여기에 나오는 4가지의 종류는 메뚜기의 종류인데, 메뚜기 재앙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었졌음이니,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 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1:5-7)  

 먼저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는데, 4종류의 메뚜기는 역시 앗시리아, 갈대아, 헬라, 로마의 침략이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두번 째 경고는 농부들에게 주어졌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 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1:11) 그렇게 되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없으므로 제사장을 보고 “슬피 울어라”고 했다. 선지자 요엘은 먼저 금식을 선포하고 “땅의 모든 거민이 모여라”고 했다. 개인적인 차원의 회개라기보다 공동체의 회개를 주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백성들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과 사람들과 짐승들의 새로운 회복을 말씀하고 있다. “땅이여 두려워 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 할 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였음이라, 들 짐승들아 두려워 하지 말라,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기뻐하며 즐거워 할 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2:21-22) 여기에서 이학재에 의하면, 이른 비는 메시야를 의미하고, 늦은 비는 성령으로 해석을 한다. 이러한 축복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요,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2:28-29) 이는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사람들, 어린 아이들,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도 영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의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 흩어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3:2)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인데, 여호사밧이란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 라는 의미이다. 예레미야는 그 곳을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이야기하는데, 살육의 골짜기였다. 에스겔 39 11절에서는 하몬 곡의 골짜기를 언급하고 있다. 선지자 요엘이 여호사밧 골짜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드고아 근처 베라카에서 승리한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여호사밧왕 때로 돌아가서 보면, 암몬과 모압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는데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암몬과 모압 사람을 치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여호사밧왕과 백성이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여호와를 송축했다.(대하20:23-26) 

 

(2) 선지자 말라기 

선지자 말라기는 백성들의 예배 생활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제물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드렸으며, 그들은 눈먼 것, 병든 것을 드렸다. 이런 것은 사람인 총독도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제사는 더러운 것으로 주를 더렵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된 제사를 방관한 제사장들이 지성소로 가는 문을 닫아버리기를 원했다. “해가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중에 크게 될 것이며, 모든 곳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니,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 중에서 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10-11) 이 부분은 임박한 종말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제사장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며, 또한 후손들에게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면서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3:6) 피조물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십일조와 헌물인 헌금에 대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 하나님과의 언약 

 

 제사장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의 풍속을 따라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율법을 어긴 것과 특히 제사장들, 레위인들 및 방백들이 가장 범죄하고 있음을 보고 기가 막혀 옷을 찢었다고 한다. 그 때의 회개 기도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9:1-7)  

 대제사장 에스라는 바벨론으로 포로 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교 문화로 인한 신앙의 타락을 개혁하고, 공동체 제도와 전통을 확립했다.   느헤미야 총독은 예루살렘 성곽 건축, 이스라엘 공동체 조직 및 통치, 레위인의 직무 분담과 생활 보장, 성전 규례 확립, 안식일과 율법의 준수, 이방인과 통혼 금지 등을 추진했으며, 대제사장 에스라는 세속화 된 풍속과 신앙을 과감하게 개혁하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신앙을 재 정립했다. 그러나 에스라 법을 받아들인 이방 여인은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의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선지자 에스겔도 이러한 백성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대로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셨다. 이 회복은 개인 회복뿐만 아니라 민족 회복으로 묘사된다.  

 

3.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하심 

 

 성서에 의하면 고대의 기도는 정해진 형식이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서 미리 정해진 언어로 기도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성서 속의 사람들은 생각이 날 때 기도를 했다. 그런데 기원 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 거의 모든 유대인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대로 유대인은 귀환할 수 있었다. 다만 귀환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가운데 일부였으며, 대부분은 그 곳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 돌아온 사람들은 성전을 다시 세우고,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하였을 망정 유대 왕국을 부흥시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기도에 계통이 선 형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대인의 위대한 지도자 대제사장 에스라를 비롯한 현자들이 이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기도는 하루에 3번 행하고, 기도의 언어도 표준적인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대인이 포로가 되기 이전에는 제사장이 성전에서 매일 산 제물을 바치고, 예루살렘 밖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1년에 서너 번 예루살렘으로 상경했다. 그러나 기원 전 538년 귀환이 허용된 뒤에도 많은 유대인은 원래의 고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포로로 잡힌 땅에 머물며 예루살렘에 상경하는 일도 없었다. 그 때문에 이산 된 채로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성전에서의 의식을 모방한 기도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이를테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도 산 제물의 의식을 모방한 것이다. 성전에서는 산 제물이 여러 차례 바쳐졌는데, 제사 때나 안식일 때, 개인적으로 기도를 위해 제물을 바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의 산 제물은 하루 밤에 걸쳐 불속에 태워진다. 그래서 오후의 것은 두 번의 의식으로 간주하고, 산 제물의 의식은 하루에 세 번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하는 것은 이에 따른 것이다. 기도는 잘못된 삶에 대한 회개와 바로 잡음의 결단을 의미했다. 하루 세 번의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나가며, 만일 지키지 못한 삶이 있었다면 지키기 위한 마음의 결심과 실행을 하기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16. 세례요한

 

(1) 출생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무거운 세금과 학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야가 등장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다만 메시야가 등장하기 전에는 한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데, 메시야의 길을 미리 예비할 엘리야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말라기 3:1, 4:5~6). 그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먼저 나타난 엘리야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의 부친은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이며 모친은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이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와 친척 관계였다. 엘리사벳은 늙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아이를 갖고 싶어 늘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가랴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가랴가 이를 믿지 않았던 탓에 그는 요한이 태어나기 전까지 입이 닫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요한이 태어나자 자연히 사가랴도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가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야기가 흥미로운데, 당시 요한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하려 할 때, 주변의 친척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엘리사벳이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다”라고 말했다. 친척들이 사가랴의 의중을 알고자 아직 말을 못하던 그에게 서판을 전달했는데, 그도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명명한다고 쓰자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다고 한다.

 

(2) 세례를 베풀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또 많은 이들이 제각각 자신이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를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그는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징수하지 말라”고 말하고, 군병들에게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자신의 받는 봉급에 만족하라”고 일러주는 등 회개의 방법을 묻는 이들에게 상세히 말해주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를 받으려 할 때는 질책과 저주를 쏟아냈다. 앞서 열거한 이들과 달리 세례를 받으려는 그들의 행위가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함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회개를 종용하고, 또 당대의 기득권이었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례 요한이 메시야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야와 엘리야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에게 직접적으로 그의 정체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메시야도, 엘리야도 아니라고 밝히 말했다. 그럼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한복음 1:23) 세례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의 발언을 인용하여 자신의 정체를 설명한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구절은 이사야 40 3~5절로써,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자가 등장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자는 다름아닌 엘리야이므로(말라기 3:1, 4:5~6 참조), 결국 “내가 엘리야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3) 세례요한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선재하고 있었다

구약성경(말라기) 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돌이키겠다』고 하셨다. 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도 마태복음 17 10-13절에서 이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하셨다.

세례요한이 태어나는 배경을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 13-17절이다.『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다』는 말이다. 세례요한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육체 속에 거하는 영도 하나님이 육체가 만들어질 때 넣어준 영이므로 엘리야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인가? 열왕기하27-11절에서 엘리야는 육체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끌려 올라간(휴거된) 선지자였다. 그런데 올라간 영이 다시 육체 속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다. 세례요한의 영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영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애써 영의 문제를 육의 문제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세례요한은 단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태어났을 뿐 엘리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왜 특별히 구약(말라기)과 신약(마태)에서 두번이나 강조하고 있는가? 특히 예수님은 세례요한도 자신이 오리라 한 엘리야 인줄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실을 두고 세례요한을『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시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엘리야가 이룬 선지자적 사명같으면 성경에서 나오는 선지자는 12명이나 되는데, 왜 하필이면 실명을 거론하면서 까지 그랬는가? 유독 선지자 중 엘리야만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재설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재설은 영이 육체 라는 옥에 갇혀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시편142 7절에서『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유다서 1 6절에서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베드로후서 2 4절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베드로전서 3 17-18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옥에 갇힌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 6 4절에서와 같이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하나님께서 다시 새생명으로 부활시킬 때 죽었던 영이 새롭게 다시 살아난다. 고린도전서 15 44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영이 죽어 있었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은 이전에 있었던 영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5 49-52절 에서도 다시 살아남을 말하고 있다. 육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의 이야기임을 잘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말씀하신 뜻을 잘 생각해야 한다. 심지어 마가복음 12 25절에서도 천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렇듯 죽어있는 영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시는데, 왜 죽어있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탐욕때문에 육체에 갇힌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육체로 부터 비롯되어 나타나는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옛사람은 반드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옛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은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회개는 내가 죄인임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옛사람이라는 사실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 옛사람이 악이며 그 옛사람이 저질러 놓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죄라는 말이다. 죄는 겉으로 나타난 결과이고 그 죄의 원흉은 옛사람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과의 만남과 죽음

요한은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선지자로서 신약의 복음시대를 여시는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이전부터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세례 요한도 자신이 증거해야 할 메시야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다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머리 위에 머무는 이를 보면, 그가 바로 메시야일 것이라는 정도만 알았다. 그 메시야를 기다리며 요한은 계속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드디어,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와 신약시대를 여는 구원자가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이 성사되었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시라고 분명히 증거하였다. 메시야를 증거하는 엘리야의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이후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헤롯이 그것 외에도 몇 가지의 누명을 더 씌워 그를 잡아 감옥에 가뒀다. 헤롯은 당장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그러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민중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고 있어서 반란이 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헤롯의 생일을 맞아 잔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춰서 헤롯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그때 헤롯은 그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다 줄 터이니 소원을 말하라 했는데, 아마 아이가 빌 소원이라는 게 기껏해야 얼마나 크겠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는 요망하게도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당돌하게도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그대로 전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헤롯은 난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맹세한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었고 잔치 자리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근심 끝에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말았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는 그렇게 생을 마쳤다.

 

 

17. 예수 그리스도

 

(1)메시아에 대한 예언  

 

.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1) 선지자 미가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 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가4:1-3)  

 화인버그에 의하면, “끝날에” 라는 표현은 메시아 시대뿐만 아니라 메시아 시대를 영접하는 시기까지를 언급하는 것이며, 메시야의 장엄하고 복된 왕국은 세상의 모든 통치와 지배를 초월할 것이라고 했다. 시온은 세상에 대한 통치의 중심인 동시에 영적 중심이 된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백성, 모든 민족들이 메시아 왕국 중심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올 것이다. 이 움직임은 자발적인 것으로 구속된 민족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날 것이다. 

 

2)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경축과 찬양이 있게 될 것을 말했다. 심판의 날은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사건을 가져오지만, 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해와 달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시점에서는 하나님은 백성과 교제의 관계를 확립하실 것이며, 백성들을 위로하실 것이며, 백성들의 대적을 제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전혀 보지못했던 잔치를 백성을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의 현실과 다가올 예언의 성취를 비교하면서 설명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어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으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리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9:1-2)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이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9:6-7)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2:2-4)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중 이 부분은 선지자 미가의 예언과 거의 같다.  

 

3) 선지자 스가랴 

 

 스가랴 9 9-10절은 메시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9:9-10) 실제로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성취되었다.(21:1-9) 

 

4) 선지자 아모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컷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9:11-12) 마지막 때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하게 되는데, 가장 가까운 민족 에돔에서 가장 먼 곳의 기업이 하나님을 통해서 기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5) 선지자 호세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찢어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며,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사흘 만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니 우리가 여호와의 앞에서 살 것이다.(호세아6:1-2) 이 부분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선지자 다니엘 

 

 선지자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는데, 다니엘이 그 이유를 깨달았으며, 이 모든 결과는 백성들의 죄악때문이고, 심판을 받게되었다. 그리고 회복을 간구한다. 다니엘의 기도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주전 539)로 말하고 있다.  

다니엘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패역했으며,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오니 큰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환상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으며, 환상을 깨달아라” 라고 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기름부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다니엘9:24-26)  

 여기에서 칠십 이레에 대해서 이학재에 의하면, 학자들은 4가지 해석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으로 기름부은 자는 안티오쿠스Ⅳ세를 의미하며, “중건하라는 영이 나올 때”를 기준으로 할 때, 주전 605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70 이레는 70 X 7 = 490 년을 의미하는데, 각각 7이레+62이레+1이레에서 먼저 7이레는 49년 간으로 포로에서 귀환하는 기간, 62 이레는 434년 간으로서 오니야Ⅲ세까지, 나머지 1이레는 7년간으로서, 안티우쿠스Ⅳ세의 핍박 전반기까지이다. 실제로 안티우쿠스Ⅳ세는 주전 167년에 제우스 신상을 성전에 세웠다.  

 이학재에 의하면,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재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7이레는 에스라 귀환까지나 느헤미야까지, 62이레는 주전 434년에서 A.D. 26년 예수님 세례 때나 종려 일로 보며, 1이레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본다.  

 두 번째는 상징적인 해석으로서 예수님의 초림에 맞추는데, 7이레는 고레스 칙령부터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까지, 62이레는 주전 400년에서 그리스도 초림까지, 1이레는 초림 A.D. 70년까지로 해석한다. 

 상징적인 또 하나의 방법은 재림에 초첨을 맞추는 것으로 7이레는 고레스부터 그리스도 초림까지이며, 62이레는 그리스도 고난부터 마지막 적그리스도까지이며, 1이레는 마지막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면 메시야 왕국은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에 해당한다. 메시야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때 즉, 70 이레가 끝나는 때이다. 70 이레가 끝나는 때는 이 세상이 끝남을 의미한다. 69 이레가 끝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이다. 1 이레의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셈이다. 1 이레인 예수님 초림과 재림의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니엘서 9 27절에는『한때 두때 반때』하나님이 이스라엘 회복(메시야 왕국)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곡식 체를 치듯이 걸러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예레미야 30 7절에서 야곱의 환란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비록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메시야 왕국과는 다른 것이며,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중 극히 적은 일부가 곡식 체를 치듯이 선택되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곡식 체를 치듯이 걸러지는 것은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실패한 민족이기 때문이다.『한때 두때 반때』가 끝나면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데, 마지막 70번 째 이레는 7년을 의미한다. 그 절반이 한때 두때 반때이다. 7년에서 전삼년반, 후삼년반으로 나뉘는데, 대환란은 후삼년반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이 말하는 70 이레와 환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천하만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만민이 구원받는 기간은 69 이레와 70 이레 시작점과의 사이에 있는 기간을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69 이레와 70 이레가 붙어있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 25-27절에서 말하는 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 까지』 즉 천하만민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 까지의 기간이 바로 69이레와 70이레 시작점 사이의 기간인 것이다. 천하만민 중 구원이 끝나면 이스라엘 백성이 대환란을 통해 곡식의 체를 치듯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7)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에스겔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말한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같더라”(1:26)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9:4-6) 이학재에 의하면, 이 내용에서 이마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 표를 받은 무리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연관되어 진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요한계시록7:3)에서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꺽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17:22-23) 이학재에 의하면, 이 내용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는 내용인데 선지자 에스겔이 말한 위의 세 가지 말씀에 대해서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로 말하고 있다.  

 

.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탄생기사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 그 분의 친척인 세례요한의 출생 이야기이다. 자녀가 없고, 출산 연령이 훨씬 넘은 경건한 노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밧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의 출생을 예고했다.(1:5-22) 이 초자연적인 출생은 자식을 낳을 나이가 훨씬 지나서 아들을 낳은 구약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아기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표시했다. 이 경우에 그 아이가 메시야의 출현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천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찾은 지 6개월 후에 동일한 천사가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젊은 여인에게 찾아가서 더욱 놀라운 탄생의 예고를 했다. 사람들이 대망하던 메시아가 될 아기가 자신이 낳을 것이며, 처녀였던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중에 요셉과 결혼 한 후에 아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처녀인 지금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가 말했기 때문에 혼돈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성령에 의한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의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이 그보다는 덜 놀랍지만 역시 유사한 기적이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천사의 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1:35-38) 

  

(2) 예수님의 신성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행동과 말 그리고 스스로 사용했거나 수용한 호칭으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셨다. 그 분의 행동을 통해 권위에 대한 독특한 주장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표현했다. 마가복음 11 15-17절에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쫒으시며 돈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귀신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마가복음 1 27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그리고 귀신의 왕보다 높은 인물로(3:27), 안식일보다 높은 인물로(2:23-28) 심지어 죽음까지도 지배하는 인물로(5:21-43, 7:11-17, 11:1-44) 보셨다. 그런 행동들은 자연히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느뇨? 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켰다.(11:28, 2:18), 그런 행동들에는 분명한 기독론적 주장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하는 일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중풍환자의 죄를 사해 주었을 때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 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2:7) 라고 반론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여인의 죄를 사해주었을 때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7:49)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동은 “신적 수동태”의 한 예, 수동태를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올리지 않으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스타인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은 “내가 직접 네 죄를 사하노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하셨다”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아가서 복음서 기사를 보면 반대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오해했다고 함으로서 예수님이 자기 행동을 해명하려고 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복음서 기록들은 예수님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며, 직접 죄를 용서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기독론적 의미를 갖는 예수님의 또 다른 행동은 기적을 일으키는 행동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 분의 독특성을 증언한다. 요한복음은 그 기적들이 그 분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적이라고 말한다. 비록 예수님이 기적을 행해서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시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그 분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기적은 당연히 이런 의문들을 일으켰다. 바람과 바다를 제어하는 그 분은 누구인가?(4:35-41)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5:1-43)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이 보인 다른 반응은 전형적이었다. 요한복음 9 32절에는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스타인에 의하면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34가지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들과 함께 15개의 복음서 본문이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는데, 동정녀 수태, 세례와 변화산을 둘러싼 사건들, 부활과 승천처럼 예수님이 기적의 대상이 되는 기록들이 있다.  

 예수님이 자기 이해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은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하나님의 율법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셨다. 마태복음 5 38-39절의 말씀을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당시에는 율법의 세세한 부분이라도 위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저주받을 일로 간주되었지만,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개정하셨고, 심지어 여러 측면을 무효로 선언하셨다. 그 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전통이나 논리로 정당화 하지 않았다. 그 분이 그런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기독론적 의미를 지니는 예수님의 또 다른 어법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새로운 것으로 그에 병행되는 어구가 발견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 한마디를 “기독론의 압축”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독특한 어구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말이 절대적 확실성을 가진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스타인에 의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너희가 나의 말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차례 자신을 과거의 위대한 인물과 비교했는데, 자신을 요한이나 솔로몬보다 큰 인물로 보셨다.(12:38-42), 요한복음 8 53-59절에서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이 자신을 신성한 지혜의 계시자로 이해 할 수 있다. 그 분은 과거의 지혜를 가르치던 교사의 방식을 이용하여 가르쳤다. 잠언, 수수께끼, , 역설, 비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단순히 또 하나의 윤리 교사로 보지 않으셨다. 그 분은 지혜의 마지막 대변자였던 것이다. 그 분은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셨으며(12:42),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23:29-30)가 그 분을 최고의 현자로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소명과 정체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자기 이해가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곳은 그 분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이다. 동시대인들은 의식과 율법에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미래가 달린 결정적인 문제가 자신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미래의 행복이 그 분과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한 사람의 운명은 그 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사람은 구원이냐 심판이냐의 기로에 서게된다. 마태복음 10 32-33절의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행동과 말에 암시된 것은 그 분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사용했거나 자신에 대한 지칭으로 받아들인 기독론적 호칭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역기간 동안 예수님은 대중의 오해 때문에 그런 호칭들을 은밀하고도 매우 조심스럽게 인정하셨다. 그 분의 어떤 동시대인들은 그 분을 다윗의 아들로 이해했으며, 마태와 누가는 자기들이 기록한 족보에서 예수님을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 분이 받아들이고 사용한 한 가지 호칭은 선지자였다. 마태복음 21 10-11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아온 엘리야(8:28) 혹은 예레미야(16:14)로 생각했던 사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또 다른 선지자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그 선지자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를 전파하고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그 선지자가 아니라, 이전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을 가져오는 “그 선지자”였던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신명기 18 15)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성경과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천사, ,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스타인에 의하면 사해 두루마리에서 시편 2 7절과 사무엘하 7 14절이 논의될 때 메시아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가복음 13 32절에서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한 또 다른 호칭은 메시아였다. 요한복음 4 25-26절의 내용을 보면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또한 예수님은 인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호칭은 모든 복음서의 배경 문서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러므로 이것이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와 일을 묘사하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호칭이었다.  

 스토트에 의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라는 자기 칭호를 118번 사용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내 아버지라고 호칭한 사례가 173회 등장한다고 했다. 그 복음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한 마가복음의 메시지와 확실히 일치한다고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라는 호칭이 17회 등장하고, 천국이 47회나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서는 “나”가 10, 하나님의 나라가 37회 등장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 등장한 한 청년을 책망하는 내용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다.(1:41) 

 

. 기적과 표적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나타난다. 최재선에 의하면 모두 372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 기적의 각각의 경우를 살펴보면 삼위 하나님께서 협력하여 행하신 기적이 50,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36, 천사를 통해 나타낸 기적이 14, 요셉에게 나타난 기적이 2,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난 기적이 25,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기적이 3, 기드온에게 나타난 기적이 2, 삼손에게 나타난 기적이 8, 다윗에게 나타난 기적이 2, 엘리야에게 나타난 기적이 7, 엘리사에게 나타난 기적이 14, 다니엘에게 나타난 기적이 2, 베드로에게 나타난 기적이 4, 바울에게 나타난 기적이 5개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나타난 횟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보아야 하며, 모세를 통해 나타난 만나의 기적만 하더라도 그 종류는 한 개이지만 그 횟수는 40년 동안 무려 14,610번이나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기적을 나타내신 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는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요한복음 2 1-12)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표면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의를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하였다. 이 기적이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하니, 그것이 예수님의 성역의 영적 성격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표적”이란 그리스도 영광을 알려준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주 만드신 행적이 영적 교훈을 준다고 주장함이 마땅하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예수님의 첫 표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 등등 이런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었다. 성경에는 혼인잔치에 대해서 3군데 나온다. 가나의 혼인잔치, 마태복음 22장에서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이다. 세 혼인잔치는 모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혼인잔치가 끝나기 전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혼인잔치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혼인잔치의 연회장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물항아리가 여섯개가 있었다고 했다. 육은 인간의 수를 나타내는데, 유대인들은 항상 외출하고 오면 사막지대라서 물로 씻어야 했다. 이것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지키던 것이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포도주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과 포도주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물항아리 여섯개에 물을 가득채울 것을 말씀하셨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구약의 율법을 말한다. 아직 복음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이 가득차게 되면 이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5 39-40절에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으며, 이 성경(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는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항아리는 여섯개인데,『물이 아구까지 찼다』는 것은『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서 스스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발견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율법을 잘지켜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말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라는 말이다. 물은 구약의 율법이지만 포도주는 신약의 마지막 유월절에『새언약인 예수님의 피』라고 하셨다. 새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비밀이 있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새언약이다. 율법으로는 완전한 혼인잔치가 될 수 없지만, 새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새언약)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나이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를 말하고 있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아닌데, (율법)이 가득차므로 죄를 깨닫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새언약)로 말미암아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룩한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율법으로 죄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계속 대속하여야 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계속 죽게 만드는 모순적 상황이 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 집에서 포도주 만드신 기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천국이 임한 단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2 1-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던 것이다.  

 이 사실은 메시야의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 55 1-5절의 말씀의 성취이다. 거기에서 말하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 부활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타자를 만나는 종교이다. 초기 기독교 체험은 이 타자를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만난 것이다. 부활신앙이 기독교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집중적이며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 교인들에게 그들의 회심조건과 회심 모습을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말해주고 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 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이시라” 계속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 14절에서  이 확신이 미래 생명에 대한 그들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바울은 5년쯤 뒤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공동체의 설립 기반이 된 “좋은 소식”의 기본적인 뼈대를 다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5 3-8절의 내용을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들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해준 내용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보이셨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체험한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당시에 살아 있어서 그 체험을 입증할 수 있었다. 바울 자신도 체험한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활 체험의 직접 증인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사실적 혹은 심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종교적인 상징을 도구로 기술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9 1절에 “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사도로 부르심과 연관지어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고 있다. 또 자신의 사도로 부르심을 변호하는 다른 부분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 15-1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에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세 번이나 나온다. 한번은 직접적인 이야기로 9 3-9절의 말씀으로, 두 번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에서 나온다.(22 6-11절과 26 12-18) 이 기사들은 세부적인 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9 7절에서 바울의 동료들은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22 9절에서 그들이 빛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 이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이었고, 그 결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내용들은 근본적으로 갈라디아서 1 15-16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은 초월적이시고 명령하시는 존재로서 예수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분이 명령하시고, 능력주시는 말씀, 이것은 모두 부활 기사의 가장 일관된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를 전하는 도구가 실재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약한 수단이다. 갈라디아서 1 16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의 체험은 개인적인 능력을 행사하던 또 다른 주체에 대한 체험이었다. 사도행전 기사에서 그 목소리가 바울에게 묻는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때 사실 바울이 핍박한 대상은 인간 예수가 아니라 메시아 공동체였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라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살아계시고  메시아 공동체 안에 능력있게 임재하시는 분으로 체험하였던 것이다.  

복음서에는 두가지의 기본적인 부활의 기사가 나와 있다. 첫 번째는 빈무덤 기사이다.( 16:1-8, 28:1-8, 24:1-11, 20:1-10) 추종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후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가서 예수님이 거기에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달한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전달자에게서 들었다. 돌이 사람의 힘으로 굴려내기는 너무 무거웠다. 무덤이 빈 사실은 찾아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주된 논점은 예수님이 죽음의 장소에 있지 않으시고 그들보다 앞서 가셨다는 것이다. 빈 무덤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 기사들은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공개되어 있었다. 그 분은 장사지낸 곳에 계시지 않았으며, 그 분의 새 삶은 시공간적으로 정확한 제한을 받지 않았다. 뒤에 남은 수건은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된 한 사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20 6-9절에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부활기사의 두 번째 종류는 출현기사이다. ( 16:9-20, 28:9-20, 24:13-49, 20:11-21:23) 이 기사들은 예수님의 몸의 실재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지금 살아계시는 이 분은 전에 죽으셨던 분과 다른가 같은가? 예수님이 죽기 이전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영화로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이전의 몸은 죽어야 하는 몸이지만, 부활한 이후의 몸은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이다. 몸이라는 차원에서 육의 몸에서 영의 몸으로 전환된 것이다. 영으로서는 동일한 분이지만 몸으로서는 다른 몸임을 이해할 수 있다. 부활의 몸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변신이 가능하며, 시공간을 초월한다.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부활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놀람 그 자체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벽을 뚫고 들어오셨다. 제자들이 있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뿐만 아니라 거기 나타나신 예수님은 이전 분의 그림자가 아니라 능력이 많으시고 명령하시는 모습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두드러진다. 예수님은 성경을 해석해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부활체험은 복음서 기사에만 제한될 수 없다.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체험과 확신은 무덤도 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환상도 보지 못하였던 사람들에게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강력한 임재에 대한 체험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활에 대한 이런 이해가 복음서에 표현되어 있다.

요한복음 20 20-23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분명 제자들에게 능력 주심이 성령에게서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이 성령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직접 나오며, 제자들은 이 능력으로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복음 24 47-49절의 말씀도 유사하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2 1-4절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말에 이어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베드로는 첫 번째 설교에서 말한다. 사도행전 2 12-13절에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 38절에 따르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성령은 신자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행하였다. 갈라디아서 3 3-5절을 보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섞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믿고 들음에서냐” 그리고 신자들의 인식 변화를 가져다 주는 주체도 성령이었다.  

 갈라디아서 4 6절에서 “이 성령은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다. 생명을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이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고린도후서 3 17-18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2 12절과 16절에서 성령과 주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는 먼저 성령의 기원을 말하고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말로서 논의를 마친다. 그리고 로마서 8 11절에 다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예수님이 잠시 생명을 회복해서 추종자들 일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확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수년 후에도 계속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으로 검증된 그분의 새롭고 능력있는 양식으로 살아계신다.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하고 계신다는 확신이다. 그 분은 영을 통하여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룩 존슨) 

 부활에 대한 요한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라고 질문을 했다.  

 예수께서 대답하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침에 놀라더라. 

 이 글은 출애굽기 3 106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조상의 하나님이 아닌 산자의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다. 산자의 하나님이란 언약의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조상의 혈통인 죽은 자들 속에서 나타났던 과거의 하나님이 아닌, 영으로서 부활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의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혈통으로서 아브라함이 아닌, 믿음으로 영생을 약속받은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8 10-11절의 말씀을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신비스러운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5 35-44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하리니 “어리섞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 라고 하고 있다. 부활은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으로 갈아입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였으며, 거듭난 자는 영의 몸을 입고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18. 열두 사도시대의 선교

 

(1) 열두 사도

마태복음 10:2-4에서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베드로는 시몬이라 불렀으나 예수님이 베드로(반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다. 반석은 히브리어 페트라에서 왔다.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보다 권위는 아래였다. 신약에서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기록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또는 형이다. 성경은 형제로 나온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심이 아니라 정학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전승은 그가 러시아로 건너가 선교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성경 속에서 의외로 적게 나오면서 입지가 작다. 초대교회 문헌 속에서도 안드레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세베대의 아들 큰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이다. 대 야고보로 부른다. 보아너게(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다. 최초의 순교자다. 헤롯 아그립파에게 순교 당한다. 베드로는 풀려나와 복음을 전한다.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 사도이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요한 서신의 기록자이다. 혹자는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보기도 한다.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다. 바돌로매의 소개로 예수님께 왔다. 그리스에서 선교하다 순교 당한다. 그의 묘가 터키의 파묵칼레에 있다고 한다. 

바돌로매, 혹은 나다니엘이라고 한다. 두 가지의 이름이 너무 달라 종종 헤갈린다. 어느 것이 본명인지 정확하지 않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채 머리를 베어 순교 당했다. 

도마는 디두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뜻은 쌍둥이다.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다. 인도에서 순교했고, 신라까지 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아직도 인도에 도마교회가 있다고 한다.

마태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했다. 금융업자의 수호신이다. 세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야고보(알페오의 아들)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님의 동생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논쟁이 많다. 개신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 야고보를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촌과 친 동생이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다대오는 다대오 출신의 유다이다. 다대오로 자주 부른다.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 유다란 뜻이다. 가룟 유다는 그냥 유다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불렀다는 점이다. 유다는 찬미하다의 뜻이고, 다대오는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 이름으로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시몬은 베드로의 동명이인이다. 알패오의 아들이며, (작은) 야고보의 형제다. 열심당원출신이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순교했다.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몸이 잘려 죽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알패의 아들은 유다와 시몬 둘이 된다. 

가롯유다는 유대지역 출신이다.  다른 사도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지만 유다만은 유대 지역 출신이다. 가장 머리가 좋고 회계를 맡았다. 30에 예수님을 팔아 자신은 자살한다. 이 자리를 맛디아가 대신한다.

 

열두 사도 중에서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 제자들은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맛디아라는 사람을 택하여 세웠으나, 성경에는 맛디아의 흔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사도로 세운 것이다.

 

(2) 사도바울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의 연배는 예수님보다 서너 살 아래고, 다른 예수님 제자들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눈으로 예수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제자들보다 위대한 복음 증거자의 삶을 살았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믿어야 했던, 또 믿어야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란 이름은 헬라식 이름으로 작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로 이름을 바꾸기 전 유대식 이름은 사울인데, 그 뜻은 여호와께 구하다, 요구하다, 희망하다’이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1차 전도여행 중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사울이란 유대인 이름 대신 바울이란 이방인 이름만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의 바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특별한 배경을 갖고 태어났다. AD 1년경 지금의 터키 남동부지역인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출생했다. 즉 유대 본토에 사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즉 부친이나 모친 한쪽이 이방인이 아닌 순수혈통의 이스라엘 족속이었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할 만큼 그는 히브리신앙의 엄격한 규율 안에서 성장했다.

 

바울의 부친이 부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들을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내어,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게 한 점이다. 그리고 바울이 그 당시로서는 쉽게 얻기 어려운 로마시민권을 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부친이 로마제국에 큰 공을 세웠거나 아니면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철저한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면서, 동시에 로마시민권을 갖고 이방세계에서 태어나 헬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장차 바울이 복음 사역을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그의 스승 가말리엘 랍비는 헬라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비교적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부활과 천사 그리고 그 밖의 성경의 근본적인 신앙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바울의 스승으로서 이상적이었다.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사도직을 수행했으며, 천막 제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구애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23:16에 보면, 유대인들이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암살하려고 하는 정보를 그의 생질이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보아 그의 누이가 예루살렘에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일평생 그 육체의 가시로 고통 받는데, 구체적인 병명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바울이 이 가시를 제거해 주기를 주님께 간구한 점과 또 이로 인해 바울이 겸손해 질 수밖에 없었음을 볼 때, 단순한 병은 아닌 것 같다. 육체적인 것인지, 심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바울의 성품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품을 지녔다. 그는 이성과 영력을 아울러 지닌 사도이다. 그리고 불타는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에 부드러운 정서와 여성다운 온화한 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활달한 기상과, 투철한 사명감과 강한 윤리 의식 존엄한 정의감이 곁들여, 인간으로서 존귀한 성품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1) 바울의 서신

바울의 서신 가운데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는 것이 바로 옥중서신이다.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 감옥에서 조차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은 한 위대한 헌신자를 보게 된다. 그는 약 20년간에 걸친 전도 여행을 목숨을 걸어놓고 쉼 없이 달려갔다. 한마디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 넣은, 그 어떤 장애물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던,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다.

 

2) 그러면서 그는 동역자와 함께 팀을 구성해 선교 활동에 주력한 것을 볼 때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구제헌금을 할 때도 강제성을 띠지 않고 자발적인 참여를 촉구할 만큼 매사 무리 없이 진실 되게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신앙이 잘 자라도록 서신을 통해 계속해서 돌본 것으로 보아 성도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투철했던 사람이다. 또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시간을 바쳐 헌신하면서도 밤낮으로 일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림으로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아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3) 그런데, 그의 체격은 정신세계와는 달리,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무시당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체격은 왜소했을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목숨을 내건 고된 전도 여행을 하면서 심한 탄압과 핍박을 능히 견디어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4) 그의 설교는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은혜로 충만하여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언변보다는 문필에 더 뛰어났다. 바울은 교회내의 많은 문제들과 개인적인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관련 계시에 비추어 적절한 답변을 제시해 줌으로써 기독교인의 삶의 표준을 제시해 준 명설교가였다. 그의 서신에 보면 추상같은 질책과 함께 따스한 인정이 뒤섞여 있다. 그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한 설교의 논지를 채택하고 설교 방법을 달리할 만큼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뛰어난 사고력을 소유한 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의 공생애에 대해 체계 있게 설명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세웠으며, 교리서신, 옥중서신, 목회서신 등 분량 면에서 볼 때, 신약성경의 1/3 가량(13/27)을 저술했다.

 

5) 그에게 결점이 있다면 너무 성급한 점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도여행 시 도중하차한 마가의 실수에 대해 용서치 않고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따로 전도 여행에 나설 만큼 과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긍정적으로 보면, 큰일을 위해 사소한 인정을 버리고 매진하는 진취성과 아울러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 결코 간과치 아니하는 준엄한 성격의 소유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6) 그는 완전한 자유인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세우기는커녕 모든 부류의 사람들 앞에 종 된 심정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보아 매우 겸손한 자. 주님은 이런 그를 이상 중에 불러 하늘나라를 보여 주셨다. 하지만 그는 14년이 지난 후에 자기 말이 상당히 먹혀 들어갈 때를 기다려서 신중히 발설하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의 광경을 보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의 종으로서 이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본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주님으로부터 창세 전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역대 하나님의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시련을 겪은 사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울이다. 그는 사울에서 바울이 된 후로 순교할 때까지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역사에서 그만큼 비중이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바울의 행적에서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크게 들어 쓰셨으며 그의 사명이 얼마나 중차대했겠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쓰러뜨리려고 그야말로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는 앞날이 촉망되는 인물로 명예와 지위가 그에게 약속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처자식을 거느리고 유명한 율법사가 되어 평안히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먹고 입을 걱정이나 시련에 시달릴 까닭이 없었다.

 

그가 주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뜻밖에도 주님의 부름을 받아, 하루아침에 주를 증거하는 새 일꾼으로 180도로 전향하게 되자, 수고를 넘치도록 전도했던 것이다. 그는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 했으며, 여러 번 곤장을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가운데 헐벗고 굶주리며, 떨면서도 늘 교회를 위해 염려했다. 그는 실로 이러한 연단 속에서, 정금보다 귀하게 되어(13:12)자기의 갈 길을 다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같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가?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복음이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행위로 구원받을 인생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오직 한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으로, 성령의 사람은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자이다. 바울은 주의 사랑이 강권하여 이 놀라운 생명과 소망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 외에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윤리가치의 체계와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제시함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여, 기독교와 교회의 기틀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 이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AD 63년경에 석방되었고, 네로의 박해 때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울은 30대 초반에 회심하여, 아라비아를 거쳐 다소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1차 전도여행을 시작으로 50대 후반에 로마로 향하게 된다. 로마 수감생활에서 풀려났을 때 서바나(스페인)를 방문했을 것으로 보며, 두 번째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60대 중반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리스도 앞에서 약한 자였던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강한 자가 되었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가는 정열적인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 

 

바울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태동한 교회가, 사도들을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 제국 전역에까지 전파되어 갔던 초대교회 당시에, 처음에는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 회심한 후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대인의 온갖 핍박과 또 로마제국의 박해를 극복하며 기독교의 세계적 전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대 사도이다.

 

(3) 초대교회(안디옥) 활동

A.D. 70년과 A.D. 134년에 일어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기독교에 반감이 증대하였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 율법을 준수하던 초기 유대인들은 유대교 내의 분파로 여겨졌다. 하지만 세기 말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핍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던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저주받고 추방되었다. 이런 가운데 교회 내에 이방인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적 요소들은 기독교회를 유대 문화 안에 머물게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유대 문화에서 배척받은 기독교회는 대부분의 유대교 전통들을 거부하였다. 현실적인 면에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교회가 되어갔다.  

 폴 피어슨에 의하면 회당은 초대교회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회당에 대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에 평범하고 느슨한 조직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통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작은 그룹을 형성하여 토라를 공부하였고, 자연스럽게 회당이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모든 중요 도시에 회당을 설립했는데, 특정지역에 회당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경건한 사람 10명만 있으면 되었다. 10명이 되지 않으면 기도처로 모였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기도처를 방문하여 복음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디아스포라들이 모이는 큰 회당이 있었다. 그 곳에서 70인경이 번역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1세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거의 대부분 도시들에는 회당이 있었다. 그만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전역에 흩어져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교량역할을 감당하였다. 회당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속해 있었는데, 첫째, 경건한 유대인, 둘째, 유대교 개종자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과 동료들은 그들에게 가서 메시야가 이미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일부는 믿었지만 대부분 믿지 않았다.

유대 개종자들은 이방인으로 성장했지만 유대적인 신앙을 수용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유대적인 신앙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이방인들이 믿는 다신 신앙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유일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 사도행전 10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를 통해서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유대적인 윤리 기준을 따랐지만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준수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회당의 정식 직원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백부장 고넬료이다. 그들은 바울이 방문한 도시교회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갔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을 찾아갔다. 피어슨에 의하면 이러한 이유는 신학적이며, 전략적인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회당으로 찾아갔으며, 메시야가 오셨음을 선포했는데, 일부는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했지만 다른 사람은 거절하여, 회당은 신자와 불신자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회당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조직체를 갖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 제자들이 이방인 교회로부터 점점 더 격리되어 갔다. 유대인 교회들은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강화해 갔으며, 그런 유대인 교회들은 3-4세기에 이르러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3세기에는 영지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영지주의는 지식을 강조한다. 영지주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핵심적인 가르침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라는 것이었다. 이 기본 전제는 첫째, 구약에 나타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악한 신이다. 둘째, 성육신은 날조된 것이라고 했다. 성령 하나님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포함해서 모든 물질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영지주의의 논리는 예수님을 유령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지않았고,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구속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지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한데,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영적 지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영지주의는 교회를 괴롭혔다. 특히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을 비판한다.  

최초의 이방인 교회는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 세워졌는데, 사도행전 11 19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스데반 순교 직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4세기에 이르자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으며, 당시 안디옥은 인구가 50만 명 정도의 도시였으며,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기독교 신자라고 하니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안디옥에서 기독교 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기독교의 가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4세기가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로마인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로마의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인의 정의를 변화시켰다. 기독교인은 정당한 종교기관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4) 로마제국에서의 선교 

 

 3세기 말에 기독교 인구는 로마제국에 사는 인구 중의 약 10%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핍박의 물결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높은 수준이었다. 3세기 중반 발레리아노 황제 통치기간과 4세기 초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극한 핍박이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4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프 장군은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프가 정권을 잡은 후에 313,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기독교인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였으며, 그 결과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동등한 법적 기반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그 후 323년 그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370년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로마는 기독교를 수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교회는 독보적인 교회로 자리잡았는데, 325년에 소아시아에서 열린 니케아 회의는 최초의 대규모 세계교회 회의였다.

 

 

19. 로마의 기독교 공인

 

(1) 니케아 신조

 

초대교회는 오랜 갈등과 시련 그리고 고난과 박해 이후 313년 동방의 리카리우스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사이에 맺으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회는 새로운 활력과 최대의 자유가 찾아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자유화한 뒤 몰수된 기독교의 재산을 반환하고, 교직자에게는 국비를 보조하고,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하여 선포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와 혼합한 제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들과 좋은 관계들을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안에는 내분과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의 힘을 빌어 공존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내분을 막아야만 했는데, 당시 교회내에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약 300년동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로 믿는 분명한 삼위일체의 교리가 제정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시련과 핍박 때문에 교리적인 체계를 세울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러한 교회내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황제는 325 5 20일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공회를 니케아에서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고, 그 회의는 2개월이 지난 7 25일까지 진행되었다. 니케아는 소아시의 작은 동네 보스프러스((Bosporus) 해안에 있으며, 당시 회의가 있었던 지명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동질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니케아 신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니케아 회의는 멀리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교회의 감독들까지 불러 모았다. 니케아 회의가 열릴 때만 해도 로마교회의 감독이 그리 두드러지게 높은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로마교회 감독이 최고의 위용을 갖추고 모든 다른 감독들 가운데 수장의 자리를 주장하였다. 로마시대 교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에서 성장하고, 교회 예식에 참여하고, 비교적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면 되었다. 당시 로마문화는 타락한 문화였다. 노예제도도 있었고, 검투사들의 검투를 즐기는 문화였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순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명목주의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일부 신자들은 보다 철저한 신앙생활을 지켜나감으로서 살아있는 “순교자의 삶”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2) 수도원 운동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 운동은 3-4세기에 걸쳐 시작되었으며,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사막으로 들어가 기도하며, 간소하게 살면서 금욕적인 수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독신자로 기도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피어슨은 수도원 운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영적인 깊이, 심층적 제자도, 그리고 영적 갱신을 추구하였으며, 교회의 형식주의와 제도 존중주의와 명목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지만, 부정적인 견해는 육체를 경멸하는 성향이 있었으며,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강조했는데, 수도원 운동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강조했다.  

 4세기 후반 수도원 생활은 더욱 발전을 하여 일부 수도자들은 예배를 드리고, 일하고, 일부는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수도원의 초점은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 예배, 그리고 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에 있었다. 수도원에는 지식있는 노동력이 풍부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유해졌다. 수도원이 설립되어 시간이 흐르자 수도원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해서 부를 축적해 갔다. 수도원이 부유해진 원인은 양질의 노동력 외에도 여러 귀족들이 다른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했는데, 귀족들이 사망한 후에 그들의 영혼을 위해 수도승들이 기도해주는 조건으로 재산을 헌납한 것이다. 이런 풍습은 중세교회의 연옥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된다. 중세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연옥에 가는데, 반드시 수도승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야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수도원이 간혹 정치 세력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귀족 출신의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 되기도 했다.  

 

(3) 유럽지역에서 선교 

 

 아일랜드에는 기독교인들이 일부 살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이교도 국가였는데, 켈트족 민간 신앙은 풍요에 초점을 둔 다신교 신앙이었다. 그 제사는 성전 매춘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예배자들은 예배행위의 일부로 남창이나 여창을 이용하였다. 이외에도 제사와 함께 유아 희생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패트릭과 제자들이 아일랜드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기독교를 확장해 나갔으며, 그는 이후 스코틀랜드, 영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독일로 가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따라서 수도원의 중심은 아일랜드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켈트족 수도원은 급속히 성장했으며, 선교본부로 삼았으며, 패트릭이 사망하기 직전에는 아일랜드가 거의 복음화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패트릭의 영적 후예인 콜롬바는 스코틀랜드를 거쳐 “아니오나 섬”으로 들어가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오나 수도원은 선교의 기지가 된다. 켈트족 선교사들은 섬을 가로지르는 곳에 여러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마지막 종점은 영국의 해변인 린디스판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은 로마화한 영국에서부터 아일랜드로 전파되고, 한 세기가 지난 다음, 켈트족 수도승들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신선한 복음의 생명력이 뿜어져 나와 로마 문화를 따르지 않았던 원주민들과 부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켈트족과 로마교회는 문화적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선교운동을 독립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로마교회에 예속시켜 할 것인가가 그 당시의 이슈였다고 한다. 켈트 지도자들이 어거스틴을 만나러 왔을 때 영국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에는 권력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피어슨은 분석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켈트족의 교회를 로마교회의 권위아래 굴복시키고, 영국교회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가 하나로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 개종과 영국교회의 통일은 지연되었으며,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수세기 동안 존재하는 적대감도 더욱 복잡하게 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664년 휘츠비(Whitby)종교회의에서 켈트족 지도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협박에 못이겨 로마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모든 영국 군도의 교회가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콜롬바누스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했으며, 후에 프랑크 왕국을 세운 프랑크인들에 대해서 선교조직체를 이용해서 영적 갱신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콜롬바누스의 선교는 훌륭했지만 지역을 관할하는 감독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황실은 명목상으로는 기독교를 표방하였지만 콜롬바누스가 통치자들의 부도덕을 꾸짖을 때에 황실은 그를 프랑스 밖으로 추방시켜버린 것이다. 마침내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수도원의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은 변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힘을 잃고 혼돈 속으로 무너져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로마제국은 기독교와 동일시하였다. 그것이 로마 사람들이 가진 명목상의 신앙이었다. 기독교 왕국은 이슬람교와 바이킹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패배를 하게된다.  

 당시 로마제국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원래 로마제국은 지중해 동부 과거 알렉산더 헬라제국의 영토들인 헬라반도와 소아시아 반도 그리고 시리아, 이집트, 유다, 지중해 서부의 북 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 에스파냐,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 등 기존 영토에 이어 영국영토인 브리타니아와 라인강 서쪽의 독일 땅 게르마니아, 그리이스 북쪽의 루마니아가 된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는데, 이러한 영토확장은 로마제국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으나, 로마제국의 시민들과 시민권 미소유자 사이에는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게 되었다. 황제 테오도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로마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보고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던 것이다. 서쪽을 서로마제국, 동쪽을 동로마제국, 이후 비잔틴제국이라고 한다.  

 

(4) 동서 로마 시대의 교회

 

동로마제국은 7세기 초만해도 크고 강력했다. 이집트, 소아시아, 대부분의 중동지역, 그리고 북아프리카 일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이슬람교가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에 있었던 헤지라는 이슬람교의 시발로 간주되는데, 10년 후인 632년에 마호메트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여러 지역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2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1년 뒤 안디옥, 두로, 지중해 연안도시를 점령하였다. 그 후 10년 이내에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였고, 소아시아로 쳐들어갔으며, 673년에서 678년 사이에 거의 전역을 정복했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까지 살아남았지만 세력이 아주 약화되었으며, 715년까지 무슬림 정복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거의 대부분 정복하였다.  

 이들 지역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이탈리아로 떠났으며, 나머지는 무슬림 땅에 그대로 남았다. 무슬림 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교회는 이집트의 콥교회였으며, 다른 교회들도 여러 지역에서 살아남았다. 북아프리카 교회와 중동지역의 교회들은 다른 교회와 교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두었다. 핍박하지도 않고, 이슬람으로 개종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특별세를 내야했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 결과 여러 곳에 있던 교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는 분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회가 소멸된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동로마 제국과 강한 일체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동로마는 교황권이 강하였고, 서로마는 약하였다. 로마주교와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에 비하여 훨씬 독립적이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과 교회의 친밀한 동일감으로 인해서 북아프리카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정복자들을 부패한 기독교 국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해방자로 보았던 것이다.  

  

 

20. 중세 시대 기독교

 

(1) 바이킹의 침략과 교회의 타락 

 

 9세기에 유럽은 바이킹의 계속적인 침략을 받았다. 바이킹은 옛 스칸디나비아 사람들로서 현재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지역의 출신들이었다. 바이킹은 이교도들이었지만, 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다른 부족들과는 달랐다.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부족들은 로마제도를 수용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바이킹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잔인했고, 도시와 성체들을 습격했으며, 수도원과 교회를 약탈하였다. 사제들을 죽이고 수도승을 노예로 만들었다. 바이킹은 프랑스에서 성직자들을 삼분의 일을 죽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교회의 입장에서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846년 무슬림은 로마를 약탈하고 성 베드로 성당을 불태웠다. 871년부터 899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알프레드 대왕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덴마크 바이킹을 물리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였으며,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는 영국에 종교와 지성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혼돈의 시대에 그는 교회를 조직하고 학문을 증진시켰다. 영국이 선교의 본산지가 된 것이다. 영국 선교사들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게 복음을 전파시켰다.  

 유럽은 바이킹의 침략이 있은 후에 신성로마 제국이 생겨났다. 찰스대제 혹은 샤를마누 대제는 732년 무슬림 침략군을 물리치고 현재 프랑스와 독일 땅을 통일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은 그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왕관을 씌워주었다. 찰스대제는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내에 있는 교회에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그는 영국 요크에서 알쿠인을 불러왔는데, 알쿠인은 켈트족 교회 전통을 가진 지도자로 교회를 개혁하였다. 그는 학문을 강조하고 효율적인 행정을 도모했지만, 찰스대제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들이 제국의 여러 부분을 물려받은 후에 888년경에 제국은 분열되고 마는데, 이것이 크다란 권력공백을 야기하면서 서유럽은 혼란과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새 수도원이 클리뉘(Cluny)에 설립되었는데, 현재 프랑스 브로고뉴 지방이다. 이 수도원은 교회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 때까지 수도회 제도는 없었다. 수도원들은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상호 조직적인 연결도 없었다. 따라서 주교나 귀족들이 수도원을 쉽게 지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수도원의 부패와 쇠퇴의 원인이 되고 만다. 수도원제도를 통해서 모든 수도원과 수도사의 집들이 하나의 중심 권력 아래 연결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교회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가 나타나게 된다. 당시는 국가 개념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던 시기였다.이 시기에 십자군 운동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운동은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 여러 곳에서 온 군인들과 순례자들은 함께 행군하며 일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국가관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회 제도는 부유해졌다. 부와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약해져 갔던 것이다. 초기에는 수도원에서 참된 기독교의 삶을 추구하기 원하는 곳이었으나,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깊은 신앙생활을 추구하다가 교회를 갱신하고 부흥을 일으키고 사회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던 것이다.  

 11세기 말에는 클리뉘 수도원이 설립된지 한세기 반이 지날 무렵 클뤼니 소속 수도승인 힐데브란트가 교황이 그레고리 7세로 선출이 되었다. 그는 성직자들에게 독신주의를 강요하고 싶어했으며, 평신도 귀족들이 주교를 임명하는 관행을 막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목표는 다 이루지 못하고 수세기 동안 사제들에게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 법적으로 결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힐데브란크 교황은 주교를 서임할 때 지역 귀족이 주교에게 하사하는 관례를 없애려고 했는데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힐데브란트는 역사상 가장 높은 교황권을 주장했는데, 교황과 국가가 수세기 동안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11세기말에 클뤼니 수도원이 쇠퇴하자 새로운 수도회 제도가 탄생했는데, 1098년에 설립된 시토파 수도회였다. 시토 수도회는 금욕주의적 고행과 신비적인 경건으로 성장했다. 수도승들은 규정식을 먹었다. 그들은 공동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언제나 촛불을 켜놓고,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도록 옷을 입고 잤다고 한다.  

 

(2) 십자군 운동과 십자군 정벌 

 

. 십자군 운동의 원인들 

 

 1) 종교적인 원인 

 

 신학이 문제였다. 중세신학은 죄에 대한 두가지 형벌이 있었는데, 영원한 형벌과 일시적인 속세의 형벌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사거나 남을 위해 사면 그 사람의 모든 죄의 일시적 형벌이 용서받고, 연옥에 있는 영혼이 즉시 석방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하나님을 떠난 죄)의 영원한 형벌을 치르셨고, 각 개인은 그 후에 살면서 짓는 죄들에 대해서 일시적 형벌을 치러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충분히 고행을 하든지, 아니면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사상에 따르면 이것은 연옥의 불가운데 수천년 동안 고통하며 보내는 것을 의미하며, 전형적인 중세 카톨릭 교인들은 지옥보다 연옥을 더 무서워했다고 함 

고백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게 되면 신부는 어떤 고행을 해야할지 처방을 내려주었다. 성도는 사제의 처방에 따라 자선행위를 하거나 특정 성지를 찾아 성지순례를 하거나 몇 번 동안 기도를 해야하거나, 성인이나 순교자의 성골 혹은 성물을 경배해야만 했다. 고행을 충분하게 하지 않으면 남아있는 분량은 연옥에 가서 채워야만 한다고 믿었다.  

 

 피어슨에 의하면 성지순례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십자군 운동에 나타난 정신이다. 중세 전반을 통하여 사람들은 성인들의 유골을 모신 특별한 성당을 순례하고 경배했다. 특히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흔적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교회는 이런 유물들을 경배하는 것이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단축시켜 줄 것으로 말했다. 그런데 무슬림 세력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수세기 동안 성지순례를 허용했지만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고행을 대신할 선행으로 십자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게 된 것이다.  

 

2) 경제적인 원인 

 

 970년부터 1040년까지의 48년 동안 기근이 들고, 1085-1095년 사이에 사정은 더욱 나빠졌으며, 세기 말에 이르자 빈곤과 사회 불안이 극에 달했다. 당시 유럽에는 인구가 너무 많고 사람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귀족자녀들 가운데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자녀들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들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혹은 탐험가로 가는 것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혼돈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였다. 

 십자군 운동의 목표는 터키 무슬림이 지배하는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동방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4차 십자군 원정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로마제국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은 터키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교회는 분열했다. 

 1054년 교회는 공식적으로 동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 분열에는 성령론이 문제였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오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 양위로부터 오는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인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사실은 로마의 주교가 전체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제국의 중심지를 자신의 이름을 붙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이 전 세계의 교회를 다스리는 수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1054년에 갈라진 후로 교권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1096년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 우르반 Ⅱ세로부터 도움을 요청했다.  

 

. 십자군 정벌 

 

 교황 우르반은 제1차 십자군 정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제공하였다. 면죄부는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 전부나 일부를 탕감받을 수 있는 증표였다. 무조건적 면죄부는 모든 세상적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증표이기에 이 면죄부를 가진 사람은 연옥을 거치지 않고, 이 땅에서 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6세기에 자행된 면죄부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시발점이 된 것이다.  

 1차 십자군은 무장한 성지순례였다. 군인들과 함께 군인들과 맞먹는 숫자의 일반시민들이 함께 갔다. 십자군 운동은 상당부분 대중적 광신도들이 참여하는 것이었다. 십자군은 유대인을 공격하여 수천명을 살육하였다. 십자군 정벌은 계속되었다. 첫 번째 정벌은 성공적이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주민들도 죽였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닥치는대로 죽였던 것이다. 4차 정벌에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보물을 약탈해갔다. 동로마 교회를 위해 라틴계 교회를 세우고 로마교회에 예속시켰다. 이 사건은 동방교회를 서방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무슬림은 힘을 재규합하여 서구인들을 몰아내게 된다.  

 

(3) 수사들의 선교운동 

 

. 도미니쿠스회 

 

 기독교 역사에 성 도미니쿠스로 잘 알려진 “도미니쿠스 데 구스만”은 1170년 스페인 카스티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주였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개혁적인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기 교구 내에서 행정과 도덕적인 개혁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도미니쿠스는 훌륭한 영적 훈련을 받았고,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사로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수사들은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훈련 방식을 따라 살았다. 그런 까닭에 도미니쿠스는 사제 공동체에 속해 있었으며, 영적 수련, 도덕적 순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추구하였다. 1206년 도미니쿠스는 감독의 프랑스 선교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집을 짓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단자들을 개종시켜 바로잡아 교회로 돌이키기 위해 성결, 사랑, 그리고 청빈서약을 하였다. 그들은 무력사용을 거부하였다. 권력자들이 이단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십자군을 출병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도미니쿠스 공동체는 강제 해산을 당했으며, 그와 감독은 스페인으로 강제 소환당했다. 감독은 죽었지만 도미니쿠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프랑스 남부로 돌아갔는데, 현지 감독이 도미니쿠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1216년 교황은 마지못해 새로운 수도원을 허가했던 것이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출신 1기 유럽 선교사들은 모두 16명이었는데, 피어슨에 의하면 그들은 군대처럼 이동성을 갖추고 사역을 하였다고 한다. 도미니쿠스는 그들을 파리, 볼로냐, 로마, 스페인 돌로레 등지로 흩어져 사역하게 하였다. 수도회는 여러나라로 퍼져나갔으며, 설립 후 4년만에 8개의 나라에 조직되었고, 60개의 숙사가 세워졌다. 21년이 지난 다음 수도회원 중 한사람이 추기경이 되었으며, 1276년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원이 교황이 되었다. 세기가 끝나기 전에 404개의 숙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후 도미니쿠스회는 페르시아에서 활동하게 된다. 베네치아 무역상인 두 형제 니콜로 폴로와 마태오 폴로가 있었는데, 그들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들의 최초 동쪽 여행은 1260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1269년 기독교인 교사들을 보내달라는 중국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중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왔으며, 1271년 도미니쿠스회 소속 선교사 두 사람이 폴로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동행했으나 돌아오고 말았다.  

 

. 프란치스코 수도회 

 

 프란시스코라는 사람은 포목상을 하던 부잣집 외아들이었으나 삶의 목표가 없어 방황하던 젊은이였다. 그는 전투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낸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204년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위기상황을 겪으며 점진적인 개종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프란시스는 로마로 순례여행을 갔다. 로마에는 그 당시 낡은 성당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성당보수를 하면서 2년을 보냈다고 한다. 프란시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프란시스파는 조직도 전혀 없었으나 복음서대로 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 절대 청빈으로 살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 당시 선교적으로는 가장 탁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이집트로 가서 십자군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이슬람교 군주들인 술탄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술탄들은 그를 성인으로 여기고 정중하게 영접하였다. 프란시스는 다른 프란치스코 수도승들을 무슬림에게로 가서 전도하도록 파송하였다. 그러나 무슬림 지역으로 간 선교사들은 대부분 순교를 하게 된다. 교황은 이 무렵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1216년 프란치스코회는 “작은 형제회”로 조직되었는데, 작은 형제회이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같은 사랑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다른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간소한 조직에서 복잡한 신학기관으로 변모를 하게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규정을 스스로 느슨하게 하여 돈과 재산을 기부받게 되었으며, 아주 부유하게 된다.  

 프란치스코회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17개의 선교기지를 세웠다. 선교사 중에 “몽테코르비노의 요한”이라는 자는 프란치스코회 소속 선교사로서 1294년에 중국에 도착했다. 1305년 그는 교회를 설립하였고, 교인이 6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368년 선교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던 몽고제국이 멸망하고 명나라가 등장하자 중국에 교회를 세우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중국에서 교회는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21. 개신교 시대  

 

(1) 청교도 운동과 경건주의 운동  

 

.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 

 

 1) 루터 

 

 루터는 1483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나 광산업자가 되어 경제력을 갖게 되었고, 신분도 상승하였다. 1501년 마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구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수도사로 입문한지 2년만에 1507 4 3일 신부로 서품을 받게된다. 그는 1510년 말에서 1511 4월까지 수도원의 임무인 성지순례를 위해 걸어서 알프스 산을 넘어 로마로 갔다. 루터는 로마에서 사제와 감독들 사이에서 성행하는 부패와 타락상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1515년 루터는 수도원에서 학감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수도원 산하에 있는 11개의 수도원 총감독이 되었다. 1517년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인 요하네스 테첼(Tetzel)이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는데, 면죄부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격노했으며, 이런 면죄부는 루터가 믿게된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에게 “만일 교황이 연옥에 있는 불쌍한 영혼을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데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반박제안을 하면서 반박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여 비텐베르그 교회의 문에 붙인 것이다. 그 후 1520년 루터는 유명한 세편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첫째의 논문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인데, 루터는 교황이 교황권을 행사하기 위해 쌓아놓은 세가지 부벽이 있는데, 이제 그가 세가지 부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세가지 벽 중 첫번째는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이다. 모든 신자들은 사제들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주장은 가치가 없으며, 이것은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둘째는 루터는 교황뿐만 아니라 세속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도 의회를 소집하여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루터는 사제들의 결혼, 탁발수도회의 구걸금지, 창녀촌 폐쇄, 그리고 엄청난 감세와 교회 직분자 감축을 포함한 교회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한 것이다.  

 두번째 논문은 “교회의 바벨론 감금”으로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반박한 글이다. 성례의 유일한 가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로 그리스도와 사죄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7가지 성례가운데, 2가지인 세례와 성만찬만을 인정하고, 성지순례, 공덕 등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믿음으로 거저 받는 사죄의 약속에 대한 대체물이라고 지적하였다. 세번째 논문은 “크리스천의 자유”였다. 이 논문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자유로우며, 율법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개인적 관계 안에 있기에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후 1521년 루터는 황제와 제국의 최고회의(보름스)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여야만 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사상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고 확실한 이유없이는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후 루터의 개혁운동은 신속하게 퍼져나간 것이다. 카톨릭 군주들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터키족이 서유럽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터키를 물리치기 위해 개신교의 진압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스칸디나비아로 간 루터 선교사들은 중세 기독교 왕국 선교패턴을 따랐는데, 그들은 군주를 새로운 루터교 신앙으로 인도하고, 교회를 개혁하였다. 그들은 루터 운동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로 전파하였으며, 이들 나라들은 루터교를 국교로 수용하게 된다. 이런 기독교 왕국 패턴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사람을 가르치고 교회를 재조직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런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2) 칼빈 

 

 1536년 개신교 종교개혁이 19년 동안 놀랍게 퍼져나갔다. 쯔빙글리(Zwingli)는 취리히가 개혁사상을 수용하게 하였으며, 중부 유럽에는 여러 개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칼빈은 1509 7 8일 프랑스 파리의 작은 마을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감독의 비서로 교회 재정을 관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평민이었지만 감독과 귀족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었다. 칼빈은 고향 귀족 자제들과 함께 동반하였으나, 얼마 후 칼빈의 아버지는 감독의 신임을 잃게 되고, 그의 아버지는 칼빈을 1528년 오를레앙(Orleans)대학으로 보내 법학을 배우게 하였다. 그 대학 교수 가운데 한 분이 비밀리에 루터교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개신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 강요』(1536)라는 책을 쓰게 된다. 피어슨에 의하면 그 책에서 자신이 “갑자기 개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쓴 이유는 첫째, 성장하는 프랑스 개신교 운동을 지도하고, 둘째, 왕에게 개신교는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초기 교부들이 가르치고 믿었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후에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다. 그리고 제네바 개신교 운동의 핵심적 인물이 된다. 이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프랑스 개신교 망명자들 500명을 목회하였다. 그 후 다시 제네바 조교지도자들은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로 돌아오도록 간청하게 되고 그곳에서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하는 교회정치 구조를 만든다.  

 칼빈주의자들의 모임은 스페인이 통치하는 로마 카톨릭 국가인 네델란드에도 생겨났다. 그리고 칼빈주의 교회는 왕이 로마 카톨릭을 선호하는 프랑스에도 생겨났으며, 평신도가 참여하는 교회 정치시스템은 칼빈주의를 영국 청교도 가운데서 성장하게 하였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내에서도 성장하게 하였다.  

 칼빈의 영향력은 그의 저술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1559년 『기독교 강요』마지막 증보판이 출간되었으며, 칼빈은 목회자 160명을 훈련시켜 프랑스로 보냈다. 선교사로 프랑스로 간 많은 칼빈의 제자들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인구의 삼분의 일이 개신교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프랑스에 핍박이 심해져 교회들이 파괴되었고, 칼빈주의 선교사들이 네델란드와 벨기에, 헝가리, 폴란드로 가게된다. 1555년부터 1558년까지 브라질로 파송한 프랑스 위그노 선교(The French Huguenot Mission)는 유럽 이외의 국가에 보낸 첫 번째 개신교 선교 사역이었다.  

  

. 프로테스탄트 운동 

 

 개신교 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보여주었다. 여러 모양의 교회가 형성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거의 허락하지 않았던 상황화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이런 다양성은 물론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16세기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은 개신교를 비난하였다. “개신교는 참 교회가 아니다, 개신교는 선교적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16세기 개신교가 선교활동에 미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개신교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을 때는 개신교 지역은 군사, 경제가 거의 탈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은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 국가들은 당시 해상권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 유럽에서 힘을 가지고 세계로 나간 나라는 스페인, 포르투칼 뿐이었다. 개신교 국가들인 네델란드와 영국이 해외로 빠져 나간 것은 한참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1534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영국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립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국교의 수장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신학적인 개혁이나 영적인 갱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개인적인 욕망(이혼문제)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 캠브리지에는 성경말씀과 루터의 개혁적인 글들을 읽으며 참된 개혁을 갈망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이후 에드워드가 죽자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딸 매리가 여왕이 되면서 카톨릭을 재건하였고, 매리 여왕은 그녀의 왕권을 행사했던 5년 동안 개신교도 300명을 화형에 처했던 것이다. 5년 동안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유럽대륙으로 도망쳤다. 그 후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등극하여 1603년까지 다스렸는데, 여왕의 관심은 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나라를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은 막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세계 최강의 해상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왕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교회를 더욱 개혁적이고 더욱 성경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청결하고 정화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로 그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청교도는 성경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고 가르치며 교육을 강하게 옹호하는 목회자를 원했다. 청교도들은 영국교회 전체를 개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청교도 운동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된다. 결국 청교도는 분열되고 말았다. 일부는 성공회에 그대로 남고, 다른 사람들은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 후로 회중교단, 침레교, 퀘이크 교도들이 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타계한 후 스코트랜드 출신 제임스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카톨릭 신자였지만 그는 장로교인으로 성장하였다. 성공회에 빠르게 적응하였다. 그는 “장로교가 군주정치에 동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과 동의하는 것과 같다” 라고 하면서 왕은 교회정치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찰스 2세 이후 청교도는 다시 핍박을 받게되는데, 영국은 청교도들에게 가혹하게 했으며,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일부 추방된 청교도들이 먼저 네델란드로 갔으며, 그 후 뉴잉글랜드(오늘날 미국)로 갔다. 그들 중 일부는 선교사였으며, 1631년 존 엘리어트가 메사추세츠에 도착하여 알곤퀸 인디언에게 전도했다고 한다. 청교도 신학은 초기 북미 선교운동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631년 존 엘리어트는 메사추세츠에 도착하여 록스버리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알곤킨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사역을 했다. 

 

(2) 개신교 선교단체 등  

 

 개신교 선교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위리엄 캐리라는 사람이다. 캐리 이전에도 여러 선교활동이 있었지만 그는 선교단체를 조직해서 해외 선교하는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캐리의 개념은 선교사로 선교지로 떠난 사람들만 선교에 헌신된 선교단체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남아 선교사를 후원하는 사람들까지도 선교단체에 포함시키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캐리의 선교단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으며, 새로운 출발이었다. 1792년 침례교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후원으로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침례교 해외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최초의 헌금은 13파운드 10실링 6펜스로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65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동인도회사는 아시아권에서 이루어지는 선교활동에 아주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캐리는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야했는데, 덴마크 식민지였던 “세람포르(Serampore)로 갔다. 1804년 캐리와 동료선교사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였으며, 사역영역은 엄청났다고 한다. 1810년 회심자는 300명으로 늘어났으며, 캐리는 영국, 스코틀랜드, 유럽대륙, 북미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선교의 자극을 주었으며, 선교단체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 영국 선교단체 

 

1795년 장로교, 회중교단, 일부 복음주의 성공회가 연합하여 런던 선교회를 만들었다. 런던 선교회는 로버트 마펫과 리빙스턴을 아프리카로 파송했으며, 로버트 모리슨을 중국으로, 존 윌리엄스를 남태평양으로 파송했다. 다음 해 스코틀랜드인 선교회가 에딘버러와 글라스고에서 생겨났다. 이들 선교회는 교단이 발기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1799년에는 “초교파쪽복음선교회”(Interdenominational Religious Tract Society)가 조직되었으며, 1804년에는 영국성서공회와 외국성서공회가 조직되었고,  1813년 워슬리 교파도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 유럽 및 미국대륙 선교단체 

 

 1796년 네델란드, 1815년 스위스 바젤, 1824년 베를린에서 선교단체가 조직되었고, 노르웨이는 루터교 배경을 가진 3개의 선교단체가 있었다. 그 가운데 기성교단에서 후원하여 생긴 선교단체는 없었다. 모든 선교 단체들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기성교단의 변두리에서 평신도 주도로 세워진 선교단체들이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마지막 3분기까지, 교단 선교부가 선교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학생 선교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미국 선교부가 조직되었다. 미국 해외선교위원회는 학생 선교운동을 시발로 하였지만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목사들이 조직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몰아친 교단주의 물결에 따라 미국에 있던 거의 모든 선교단체들은 교단의 행정적 지원과 후원으로 운영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교단 중심의 선교부 체제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남침례 교단과 하나님의 성회가 아주 강한 교단 선교부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복음주의 교단들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주류교단, 즉 개신교 종교개혁, 17세기나 18세기 부흥운동을 통하여 탄생했던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고 감리교 등의 선교활동은 급속히 감소하였다. 20세기 초에는 거의 미국 선교사 전체 숫자의 75%가 주류 교단 선교부 소속이었다. 1920년대에는 미국에 선교사가 1 3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교단 소속이 11,000명이었다. 북미에서는 남침례교가 성장하였다. 하나님의 성회, 그리고 다른 복음주의 교단들도 성장하였다. 초교파 선교단체인 예수전도단(YWAM), 오엠 국제선교회(OM),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BT), 파이오니어 선교회(Pioneers), 프론티어스(Frontiers) 그리고 수많은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도 성장하였다.  

   

22. 근대와 현대의 선교 

 

(1) 기독교 선교와 국제사회의 변화   

 

 기독교 선교는 발전해 갔다. 19세기 삼사분기 동안 선교는 폭넓게 수용되어갔다. 서구에 자신감과 낙관주의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기술적인 진보도 있었다. 새로운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화기술이 발명되었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출현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서구 문명은 놀라울 정도로 진보를 이어갔다. 1859년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으며, 진화론은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창조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많은 신학자들이 창조론과 진화론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860년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적 관점이 시작되었다. 독일학자들은 문학비평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성경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고등 비평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해 주었다. 성경에 포함된 여러 책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급진적인 비평가들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기본적인 신학적 교의에 도전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정치적으로 패했다. 교황국가들에게는 천년 이상 이태리 중간 삼분의 일이 속해 있었다. 1870년 이것이 종말을 맞았다. 이태리는 통일된 국가가 되었다. 교황권은 바티칸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정치적 패배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더욱 더 방어적이 되게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 동안 영국정부는 인도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수용하였다. 이전에는 동인도회사가 주도하고 있었지만 “인도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라는 조항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이 보다 자유롭게 광범위한 선교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중국 내지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영국과 중국과 무역문제로 두 번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교역을 강요하였으며, 그 결과 1842년과 1858년 영국의 강요를 충족시키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중국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선교사들과 중국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서국 제국주의 무력 그리고 아편교역과 연관시켜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2) 세계 선교 

  

. 선교의 시대적 개관 

 

 피어슨에 의하면 선교의 시대적 분류는 1792년 시작된 위리엄 캐리 시대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일부 선교사들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기도 했지만 윌리엄 캐리는 현대 개신교 선교시대를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는 선교사들은 주로 해변지역으로 갔다. 두 번째 시기는 1865년 중국내지 선교회와 함께 시작된 허드슨 테일러의 내지 선교시대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34년 시작된 카메론 타운젠드 시대였다. 그들은 선교의 초점을 인간 집단과 문화에 맞추었다. 숨겨진 종족, 간과된 종족, 그리고 미전도 종족 개념이 개발되었다. 학생 선교 운동도 거의 동시대에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시기가 도심선교 시대이다. 유럽과 북미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도시들에 대한 선교였던 것이다.  

 

. 학생운동들 

 

 1) 형제회 

 

 윌리엄스대학의 기도회와 사무엘 밀즈의 리더십을 통하여 형제회(the Society of Brethren)가 생겨났다. 그들은 선교적 관심을 부추겼다. 윌리엄스대학은 1808년에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엔도버로 이사를 갔는데, 엔도신학 대학원은 최초의 신학대학원이었다. 졸업생들의 대부분이 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그 가운데서 반은 해외 선교사가 되었다.  

 

2) 선교 탐구학회 

 

 선교에 대한 강조는 YMCA(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운동으로도 나타났다. 1844년 조지 윌리엄스는 YMCA를 창설했다. 런던 외곽지역에서 올라온 젊은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이다. 1851 YMCA는 미국에서도 조직되었으며 급속히 성장하였다.  

 

3)프린스턴 해외선교회 

 

 1840년대 로얄 월더는 엔도버에 있는 형제회 소속  선교사로 인도에서 30년 동안 선교하였던 경력의 소유자였는데, 건강을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와 프린스턴에 거주하면서 대학생들을 선교 기도모임에 초청하고 선교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토론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들은 프린스턴 해외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확산을 위해 주기적으로 모여 기도했다고 한다. 1885-1886년 학기 중 세계선교지에 사역하기 위해 1천명의 지원자가 일어나기를 기도했는데, 20배로 응답하였다고 피어슨은 언급하고 있다. 

 

4) 헐몬산 학생수양회 

 

 1885년 루터 위사드는 매사추세츠 헐몬산에서 학생수양회를 개최하자고 무디 선생에게 설득을 하여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성경공부에 추점을 맞추었으나 로버트 윌더라는 자가 수양회에 참석하여 그 집회를 통하여 100명의 선교사가 나오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수양회는 7월 내내 계속되었으며 학생 251명이 참석하였고, 7 24일에는 수양회를 마치고 기도회에서 100명의 선교사가 지원하는 감동을 경험했다고 한다.  

 

5) 대학생 세계선교 협회 

 

 1936년 노스캐롤라이나 벤리펜에서 학생들의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학생 수양회가 열렸다. 그리고 2년 뒤에 대학생 해외선교 협회가 조직되었는데, 1941년에는 미국에 36개의 지부와 2,600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학생 선교운동은 세계 여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와 선교운동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성장하고 있다.  

 

. 여성 선교사 운동 

 

 초기 선교사 협회는 모두 남자들로 구성되었지만 그들은 선교사역외에도 선교정책도 결정했는데, 당시 여성들이 그런 정책을 결정하는 선교사 협회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 시대에 여성들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여성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810년 미국 해외선교회가 조직되고 그 소속으로 여선교회도 있었지만 그 기능은 선교를 위한 모금정도의 제한적이었다.  여선교에 대한 진전은 “보스톤 여자 고아원”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새로운 시도였고, 파격적이었다. 1810년 이후 여선교회는 미국 선교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계속했다. 다음으로 발전 단계에서 여성들이 선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모두 결혼을 했어야만 했는데, 선교사 부인들은 보조 선교사로 간주되었지만 주목할만 한 일을 했으며, 선교사 부인들이 보내는 집으로 보내는 편지들이 선교잡지에 소개되면서 그들의 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수많은 선교사 부인들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독신 여선교사들이 주도적으로 선교에 참여하게 된다.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가 되었다. 네 번째 단계로서 여성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1834년 개혁교회 출신의 데이비드 아벨은 런던에 있는 여성들에게 중국과 외국에서 기독교 교육을 담당할 여성 선교회를 조직하도록 설득하여 1847년 볼티모어에 살던 감리교 여성들이 모여 “여성 중국 선교사 협회”를 조직하였다. 협회는 외국에 있는 여성과 어린아이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61년 뉴욕에 있던 개혁교회 출신 사라 도레머스는 여성 유니온 선교사 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0년 이내에 중국, 시리아, 그리스, 일본, 미얀마, 인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1852 

년에는 영국에서는 “제나나 선교회”가 조직되어 선교지 여성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23. 기독교의 종파별 현황

 

(1) 세계 기독교 종파 현황

 

11세기  공교회 중심이었던 지금의 동방 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리되었으며, 이후 16세기 서방교회내에서 종교 개혁 운동의 반대파인 천주교회와 찬성파인 개신교가 분리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가장 주된 종파는 동방교회, 서방교회,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로 형성되었다. 

개신교회는 내부적으로 개선주의인 개신교 공교회주의인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오순절 등의 교단들과 재건주의인 개혁주의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 퀘이크, 재림교 등의 교단들이 있다.

오늘날의 주요 교단 형성의 신학적 배경 이외에도 시대적인 신학적 흐름과 변화인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오순절주의, 미국의 대각성 같은흐름들도 모두 개신교 전통에 포함된다.

이처럼 정교회 천주교에 비해 다양한 흐름들이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주며 분류되고, 합류되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개신교 내의 교파 분열의 역사와 신학 논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복잡하지만, 대체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성직 구조나 정치제도 보다는 만인 제사장성을 따르는 성직 이해와 그에 따른 교회제도인 감독제(루터교회, 성공회, 감리교 )와 원로제(개혁교회 장로교회 등), 회중제(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다양한 교회제도를 채택하였다. 성서에 나오지 않는 성례전에 대한 반대(천주교회는 세례, 성체, 고백, 견진, 혼배 등 7, 개신교의 성례전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성만찬, 세례 2개이며 그 외는 예식임)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2)세계 기독교 및 선교 통계 (2018년 기준)
천년 이상 유럽은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대륙이었다. 그러나 2018년 아프리카의 기독교인 인구는 5 9,900만 명에 이르며, 유럽의 기독교인 인구 5 5,000만을 상회하였고, 남미 대륙의 기독교인구 5 9,700만 명도 유럽을 앞질렀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이웃인 중동에서는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인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는데, 1900 13.6%에서 현재는 4% 이하로 줄어 들었다. 1800년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세계 인구의 33%에 불과하였지만 2018년에는 57%로 늘어났으며, 2050년에는64%에 이를 전망이다. 

세계 인구 의 인구는 75 9,717 6,000 (2018년 중반 연 증가율 1.20%)이다. 세계 종교 인구는67 5,872 2,000 이며, 세계 기독교 인구는25 683 5,000명이다.  

 

세계 기독교 교파별 인구를 보면,  세계 카톨릭(천주교) 인구가12 3,995만 명, 세계 개신교 인구 (성공회 포함) 5 6,718 5,000 , 세계 독립교회 인구 4 4,643 4,000 , 세계 정교회 인구2 8,449 9,000 이다.
이 중에서 세계 복음주의 기독교인3
 4,949 9,000 , 세계 오순절주의/은사주의 기독교인6 8,273 1,000 이다.
대륙별 기독교 인구로서 아프리카 기독교 인구5
 9,899 6,000 , 남아메리카 기독교 인구5 9,693 6,000 , 유럽 기독교 인구 (러시아 포함) 5 4,951 6,000 , 아시아 기독교 인구, 3 9,725 2,000 북아메리카 기독교 인구, 2 3,111 2,000 , 오세아니아 기독교 인구 2,499 9,000 이다.
세계 기독교 교단48,000
 , 세계 교회 수575 8,000 , 세계 기독교 선교 및 복음전파 사역자 (자국 사역)1,300만 명 , 세계 해외 선교사44만 명 세계 선교사 파송 단체5,400 , () 세계 기독교 순교자 (10년 평균치)90만 명 이며, 세계 세계 비복음화 인구는21 5,280 4,000 
(
출처: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 Research 2018 1월호,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파발마 2.0 2018 3월호)

 

 

24.코로나 시대의 기독교 상황

 

(1) 재난의 시대에 대한 신학적 성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창궐하더니 그 다음 한국에서 창궐하였고, 지금은 이탈리아, 이란, 미국, 일본 등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결국 대유행(pandemic)을 선언하였다. 이 질병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여러 방역 조치들 때문에 각 가정과 개인들 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기업체들, 개인사업자들 모두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교회도 공예배를 중단하거나 축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재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재난 상황에 대하여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재난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세계를 덮치는 이러한 재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재난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까?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오래된 신정론(theodicy)적 질문은 이렇게 묻는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물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1:4, 10, 12, 18, 21, 25, 31).

전통적인 신학은 선하게 창조하신 피조물이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타락하여 악이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개혁신학 전통은 주권적이고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만, 동시에 제2원인들(피조물들 사이의 인과관계에서 원인에 해당하는 것들)의 자유와 우연성도 인정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5.2.) 그러나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을 따라 그러한 것들도 그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5.4.)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종말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중간기적 삶을 사는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목도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기쁨과 생명을 맛보고 누리면서, 또한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완성을 희망 가운데 바라본다.

. 재난과 인간의 책임

일반적으로 재난이나 악 혹은 고통에 대하여 논할 때, 우리는 종종 악을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도덕적 악은 인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악으로서 잔인하고 불의하며 악하고 잘못된 생각과 행위이다. 자연적 악은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악으로서 지진, 화산폭발, 폭풍, 가뭄, 홍수 등을 뜻한다.

그런데 자연적 악이나 도덕적 악으로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기술문명의 발전 때문에 야기되는 재난 혹은 악이다. 필자는 이것을 기술문명적 악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최근의 '지구가열로 나타나는 초대형 태풍들, 가뭄, 대홍수, 폭염, 폭설 등이 포함된다.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서 지구가열이 이루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예상하지 못했던 기후위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형 화학공장의 사고, 교통사고, 항공사고, 해난사고,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혹은 방사능 누출 사고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재난들에 대하여 1차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기술문명을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일들도 많다. 예를 들어, 원전 사고의 경우, 1차적 책임은 원전 관계자들이겠지만, 원전을 발전수단으로 채택한 국가 전체와 그것이 생산한 전기의 유익을 향유하던 모든 사람들도 책임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재난이 자연적 재난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인간의 기술문명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그런 재난을 일으키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적 악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구별하는 이유는 이러한 악이 겉모습은 경우에 따라, 자연악 혹은 도덕적 악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책임은 몇몇 특정인만이 아니라, 어떤 국가공동체 혹은 인류공동체 전체에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악을 자연악으로만 여기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할 것이요, 도덕악으로 치부하면, 몇몇 특정인들에게만 책임을 돌린 채 근본적인 문제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문명적 재난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인 책임 의식을 느끼고 함께 돌이키고(회개하고), 함께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어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큰 재난, 혹은 인류의 멸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는 인류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질병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질병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요즈음 창궐하는 새로운 질병들이 본래 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는 없고 야생동물에게 있었는데, 어떤 변이과정과 중간 숙주를 거쳐 사람에게도 전파된 것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것은 인간이 그만큼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지구가열을 초래하여, 야생동물의 세계를 침범함으로써 인간에게 옮겨온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자연환경, 아니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함부로 파괴하고 착취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도 회개하며 기도해야 하겠다.

 

. 재난은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가?

대재난을 만날 때, 특히 기술문명적 대재난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징벌 혹은 심판인가? 이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이다. 성경은 지진, 기근, 가뭄, 메뚜기, 전염병 등의 대재난이 하나님의 징벌로 주어지는 사례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출애굽 때에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그렇게 이해되었으며 (7:4),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드린 기도의 내용도 그러하였으며 (왕상8:35-40), 우상숭배와 불의하게 힘없는 이들을 압제하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예언자들의 경고가 역시 그러하였다 (24:1-6, 4:23-26, 8:1-10).

사실, 종교인들의 이런 식의 해석과 반응은 고금동서에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도 질병이나 재난이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5:14).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그가 장애인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9:2-3).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난과 죄를 관련지으실 때,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할 부분이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들이 재난을 당했을 때, 피해자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재난을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셨다. 우리는 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도덕적 악과 기술문명적 악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1-5)

아마도 갈리리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던 날, 성전 구역에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덕적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피해 당사자들의 죄의 문제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점을 그들의 죄가 아니라, 질문한 사람들의 죄의 문제로 옮겨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갈릴리 사람이었지만, 가해자인 로마 총독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보편적인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 사건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삶을 개혁하라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예수님은 질문자들이 말하지 않은 다른 경우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그것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다. 당시에 무슨 지진 같은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자연악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망대를 허물었다는 이야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도덕적 악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것은 망대의 부실공사가 초래한 일종의 기술문명적 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하여서도 앞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살해한 도덕적 악에 관한 것과 동일한 태도를 취하신다. 역시 피해자들의 죄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시지만, 문제의 초점을 질문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죄의 문제로 옮겨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장로회신학대학교 현요한 교수 논문 중 일부  2020.03.12)

 

. 코로나 이후 교회의 상황

코로나19 이후에 교회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당에서 예배하기 어려워지면서 많은 교회들이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로 대체하였는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61.1%의 교회가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했고, 현장 예배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는 8.6%, 현장 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동시에 한 경우는 15.6%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절반 정도(52.2%)가 출석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출석 교회에 직접 가서 예배한 경우 13.6%, 현장 예배를 하는 교회에 가서 예배한 경우 0.7%로 현장 예배 비율이 14.3%로 나타났다. 한편, 가정 예배를 한 경우는 13.2%, 방송 예배를 한 경우는 4.0%로 나타났으며, 아예 예배를 하지 않은 경우는 13.0%로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주일예배가 이전과 다르게 다양한 형태가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예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어느 정도 만족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이 했던 온라인·방송·가정 예배와 현장 예배를 비교해서 '현장 예배보다 만족하지 못했다' 53.7%, '현장 예배와 비슷하다' 37.0%, '현장 예배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9.3%, 절반 이상이 현장 예배가 더 낫다는 평가를 하고 있는데, 46.3%의 응답자는 온라인
방송가정 예배가 현장 예배에 못지않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일성수에 대해서 '온라인 예배 또는 가정 예배로도 대체할 수 있다' 54.6%, '주일성수 개념에서 주일예배는 반드시 교회에서 해야 한다' 40.7%로 온라인 예배 대체 가능성이 크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코로나19 이후에도 현장 예배를 고수하기보다 다양한 대체 방법에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현장 예배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헌금도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일부에서는 현장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헌금이 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3명 중 1명 정도(33.6%) '계좌 이체로 헌금했다'고 응답했으며, 35.7% '별도로 모아 놓고 있다가 나중에 교회 갈 때 한꺼번에 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8%는 아무 계획 없이 '교회에 가면 헌금하겠다'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코로나19 사태로 헌금이 다소 줄 것으로 예상되는데 앞으로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교회 재정도 매우 어려워질 우려가 크다. 따라서 교회는 이전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고 성도들이 관행이나 형식보다 예배와 헌금의 본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정재영교수 [출처: 뉴스앤조이] 2020.5.8)

(2) 코로나19에 대한 성경적 대응

코로나19는 우리의 관심을 교회 건물에서 교인들의 삶으로 돌려준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이번 기회를 회개의 기회로 삼고 성도님들과 함께 교회의 죄와 민족의 죄를 회개하자는 많은 교회 지도자의 글을 읽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내용은 “성전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은 다하지 않은 교회”에 대한 회개다. 이는 성경적인 태도이자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이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제사는 거창하게 드리면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를 돌보지 않는 신앙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1-17).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지금, 이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더욱더 가슴 치는 회개를 하게 한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시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라고 큰 소리로 한번 꾸짖으시고(마가복음 11:17), 그 화려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 예언하셨다(마가복음 13:2). 그리고 그 말씀은 주 후 70년에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성전이 무너진 것이 예배가 끝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전 제사가 그치게 되자 사람들은 말씀에 더 집중하였고,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실천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게 되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단번에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가난한 백성들이 제물을 사서 드리느라 애쓰는 일을 더는 필요없게 하셨습니다. 은혜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완전케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성전이 없어진 자리에 새롭게 사람들을 얽어매는 율법이 생겼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많은 부분은 안식일 율법, 정결예법, 부정한 이들에 대한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여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일이었고, 사도 바울도 율법이 아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쏟았다. 이제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를 출석하지 못하는 시기에 우리들이 할 일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의 해석을 사랑으로 완전케 하는 것이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등의 좋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적 부담감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의 전통으로 바뀔 수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후, 주일날 여러 사정으로 출석하지 못했던 분들이 자유롭게 본인이 예배 드릴 수 있는 시간에 접속해서 예배를 드린다. 새벽에 여러 제약으로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던 분들이 녹음된 예배를 새벽에 드린다. 아이들 때문에 소그룹에 오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소그룹으로 모이고, 어른들 잔소리와 눈치에 교회를 오기 꺼리던 젊은이들도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헌금 바구니가 돌아갈 때 남의 눈치를 보며 헌금하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온라인 헌금을 한다. 이처럼 여러 예배 외적인 요소를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예배에만 집중하는 새로운 기회가 생긴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질병에 대응하는 주된 방법은 환자의 격리였다. 예를 들면,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레위기 13:2-5)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격리된 이들이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치유하셨다.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나병 환자들을 만져 깨끗하게 하신 후 공동체로 돌려보내시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혈루증 앓던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지고 병이 나은 것을 믿음의 행동으로 칭찬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병든 친구를 위해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모임에 들어온 것을 보시고는 그 행동으로 표현된 믿음을 칭찬해 주신다. 예수님은 이처럼 몸의 질병보다 사회적 격리를 더 안타까워하셨다.

예수님은 몸만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코로나19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마태복음 10:28).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의미합니다. 결국 코로나19 때문에 격리된 이들이 외롭지 않게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며, 영광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이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온라인으로 소그룹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여러 이유로 교회에서 차별을 당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고 그가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은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시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그것도 안식일에 뜨게 해주셨다. , 교회가 지역 사회의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교회 성장 제일주의나 교회 안에서의 행사에만 집중했던 것을 회개하는 기회로 삼고, 일상생활 속에서 드리는 예배나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무시했던 것을 회개하는 기회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적으로 해석해서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사람과 나와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나누었던 율법적인 태도를 회개하고, 모든 이가 접속하여 드릴 수 있는 예배를 통해, 옷차림, 외모, 생활 수준, 성적 정체성 등 예배 외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했던 이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교회가 새롭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질병을 계기로 율법의 해석에 새로운 눈을 뜨는 기회를 얻게 되면, 이번 일로 돌아가신 모든 분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와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고 서로서로를 돌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코로나19 질병에 대처하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교회와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교회를 개혁하고, 율법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넘어서서, 나와 다른 이웃들과의 관계를 가꾸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성호 목사(콩코드 연합감리교회, Concord, CA) 2020 4 21일 연합감리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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