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예수 그리스도
17. 예수 그리스도
(1)메시아에 대한 예언
가.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1) 선지자 미가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 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가4:1-3)
화인버그에 의하면, “끝날에”
라는 표현은 메시아 시대뿐만 아니라 메시아 시대를 영접하는 시기까지를 언급하는 것이며, 메시야의 장엄하고
복된 왕국은 세상의 모든 통치와 지배를 초월할 것이라고 했다. 시온은 세상에 대한 통치의 중심인 동시에
영적 중심이 된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백성, 모든 민족들이 메시아 왕국 중심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올 것이다. 이
움직임은 자발적인 것으로 구속된 민족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날 것이다.
2)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경축과 찬양이
있게 될 것을 말했다. 심판의 날은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사건을 가져오지만, 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해와 달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시점에서는 하나님은 백성과 교제의 관계를 확립하실 것이며, 백성들을 위로하실
것이며, 백성들의 대적을 제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전혀 보지못했던 잔치를 백성을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의 현실과 다가올 예언의 성취를
비교하면서 설명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어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으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리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9:1-2)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이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9:6-7)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2:2-4)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중 이 부분은 선지자 미가의 예언과 거의 같다.
3) 선지자 스가랴
스가랴 9장 9-10절은 메시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9:9-10) 실제로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성취되었다.(마21:1-9)
4) 선지자 아모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컷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9:11-12) 마지막 때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하게
되는데, 가장 가까운 민족 에돔에서 가장 먼 곳의 기업이 하나님을 통해서 기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5) 선지자 호세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찢어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며,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사흘 만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니 우리가 여호와의 앞에서 살 것이다.(호세아6:1-2) 이
부분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선지자 다니엘
선지자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는데, 다니엘이 그 이유를 깨달았으며, 이 모든 결과는 백성들의 죄악때문이고, 심판을 받게되었다. 그리고 회복을 간구한다. 다니엘의 기도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주전 539년)로 말하고 있다.
다니엘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패역했으며,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오니 큰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환상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으며, 환상을 깨달아라” 라고 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기름부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다니엘9:24-26)
여기에서 칠십 이레에 대해서 이학재에 의하면, 학자들은 4가지 해석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으로 기름부은 자는 안티오쿠스Ⅳ세를 의미하며, “중건하라는 영이 나올 때”를 기준으로 할 때, 주전 605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70 이레는 70년 X 7 = 490 년을 의미하는데, 각각 7이레+62이레+1이레에서 먼저 7이레는 49년
간으로 포로에서 귀환하는 기간, 62 이레는 434년 간으로서
오니야Ⅲ세까지, 나머지 1이레는 7년간으로서, 안티우쿠스Ⅳ세의 핍박 전반기까지이다. 실제로 안티우쿠스Ⅳ세는 주전 167년에 제우스 신상을 성전에 세웠다.
이학재에 의하면,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재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7이레는 에스라 귀환까지나 느헤미야까지,
62이레는 주전 434년에서 A.D. 26년
예수님 세례 때나 종려 일로 보며, 1이레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본다.
두 번째는 상징적인 해석으로서 예수님의 초림에 맞추는데, 7이레는 고레스 칙령부터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까지, 62이레는 주전 400년에서 그리스도 초림까지, 1이레는 초림 A.D. 70년까지로 해석한다.
상징적인 또 하나의 방법은 재림에 초첨을 맞추는 것으로 7이레는 고레스부터 그리스도 초림까지이며, 62이레는 그리스도 고난부터
마지막 적그리스도까지이며, 1이레는 마지막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면 메시야 왕국은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에 해당한다. 메시야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때 즉, 70 이레가 끝나는 때이다. 70 이레가 끝나는 때는 이 세상이 끝남을 의미한다. 69 이레가
끝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이다. 1 이레의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셈이다. 1 이레인 예수님 초림과 재림의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니엘서 9장 27절에는『한때 두때 반때』하나님이 이스라엘 회복(메시야 왕국)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곡식 체를 치듯이 걸러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예레미야 30장 7절에서 야곱의 환란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비록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메시야 왕국과는 다른 것이며,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중 극히 적은 일부가 곡식 체를 치듯이 선택되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곡식
체를 치듯이 걸러지는 것은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실패한 민족이기 때문이다.『한때 두때 반때』가 끝나면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데, 마지막 70번 째 이레는 7년을 의미한다. 그 절반이 한때 두때 반때이다. 7년에서 전삼년반, 후삼년반으로 나뉘는데, 대환란은 후삼년반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이 말하는 70 이레와
환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천하만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만민이 구원받는
기간은 69 이레와 70 이레 시작점과의 사이에 있는 기간을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69 이레와 70 이레가 붙어있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장 25-27절에서 말하는 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 까지』 즉 천하만민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 까지의 기간이
바로 69이레와 70이레 시작점 사이의 기간인 것이다. 천하만민 중 구원이 끝나면 이스라엘 백성이 대환란을 통해 곡식의 체를 치듯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7)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에스겔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말한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같더라”(겔1:26)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겔9:4-6) 이학재에 의하면, 이 내용에서 이마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
표를 받은 무리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연관되어 진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요한계시록7:3)에서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꺽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겔17:22-23) 이학재에 의하면, 이 내용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는 내용인데 선지자
에스겔이 말한 위의 세 가지 말씀에 대해서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로 말하고 있다.
나.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탄생기사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 그 분의 친척인
세례요한의 출생 이야기이다. 자녀가 없고, 출산 연령이 훨씬
넘은 경건한 노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밧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의 출생을 예고했다.(눅1:5-22) 이 초자연적인 출생은 자식을 낳을 나이가 훨씬 지나서 아들을 낳은 구약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아기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표시했다. 이 경우에 그 아이가 메시야의
출현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천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찾은 지 6개월 후에 동일한 천사가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젊은 여인에게 찾아가서 더욱 놀라운 탄생의 예고를 했다. 사람들이 대망하던 메시아가 될 아기가 자신이 낳을 것이며, 처녀였던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중에 요셉과 결혼 한 후에 아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처녀인 지금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가 말했기 때문에 혼돈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성령에 의한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의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이 그보다는 덜 놀랍지만 역시 유사한 기적이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천사의
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눅1:35-38)
(2) 예수님의 신성
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행동과 말 그리고 스스로 사용했거나 수용한 호칭으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셨다. 그 분의 행동을 통해 권위에 대한 독특한 주장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표현했다. 마가복음 11장 15-17절에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쫒으시며 돈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귀신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27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그리고 귀신의 왕보다 높은 인물로(막3:27), 안식일보다 높은 인물로(막2:23-28) 심지어 죽음까지도 지배하는 인물로(막5:21-43, 눅7:11-17, 요11:1-44)
보셨다. 그런 행동들은 자연히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느뇨? 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켰다.(막11:28, 요2:18), 그런
행동들에는 분명한 기독론적 주장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하는 일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중풍환자의 죄를 사해 주었을 때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 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막2:7) 라고 반론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여인의 죄를 사해주었을 때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눅7:49)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동은 “신적 수동태”의 한 예, 수동태를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올리지 않으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스타인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은 “내가 직접 네 죄를 사하노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하셨다”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아가서 복음서 기사를 보면 반대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오해했다고 함으로서 예수님이 자기 행동을 해명하려고 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복음서 기록들은 예수님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며, 직접 죄를 용서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기독론적 의미를 갖는 예수님의 또 다른 행동은 기적을 일으키는 행동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 분의 독특성을 증언한다. 요한복음은 그 기적들이
그 분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적이라고 말한다. 비록 예수님이 기적을 행해서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시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그 분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기적은 당연히
이런 의문들을 일으켰다. 바람과 바다를 제어하는 그 분은 누구인가?(막4:35-41)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막5:1-43)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이
보인 다른 반응은 전형적이었다. 요한복음 9장 32절에는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스타인에 의하면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34가지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들과
함께 15개의 복음서 본문이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는데, 동정녀 수태, 세례와 변화산을 둘러싼 사건들, 부활과 승천처럼 예수님이 기적의 대상이 되는 기록들이 있다.
예수님이 자기 이해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은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하나님의 율법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셨다. 마태복음 5장 38-39절의
말씀을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당시에는 율법의 세세한 부분이라도 위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저주받을 일로 간주되었지만,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개정하셨고,
심지어 여러 측면을 무효로 선언하셨다. 그 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전통이나 논리로 정당화
하지 않았다. 그 분이 그런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기독론적 의미를 지니는 예수님의 또 다른 어법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새로운 것으로 그에 병행되는 어구가 발견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 한마디를 “기독론의 압축”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독특한 어구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말이 절대적 확실성을 가진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스타인에 의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너희가 나의 말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차례 자신을 과거의 위대한 인물과 비교했는데, 자신을 요한이나 솔로몬보다 큰 인물로 보셨다.(마12:38-42), 요한복음 8장
53-59절에서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이 자신을 신성한 지혜의 계시자로 이해 할 수
있다. 그 분은 과거의 지혜를 가르치던 교사의 방식을 이용하여 가르쳤다. 잠언, 수수께끼, 시, 역설, 비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단순히 또 하나의 윤리 교사로 보지 않으셨다. 그 분은 지혜의 마지막 대변자였던 것이다. 그 분은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셨으며(마12:42),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마23:29-30)가 그 분을 최고의 현자로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소명과 정체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자기 이해가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곳은 그 분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이다. 동시대인들은 의식과 율법에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미래가 달린 결정적인 문제가 자신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미래의 행복이 그 분과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한 사람의 운명은 그 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사람은
구원이냐 심판이냐의 기로에 서게된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의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행동과 말에 암시된 것은 그 분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사용했거나 자신에
대한 지칭으로 받아들인 기독론적 호칭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역기간 동안 예수님은 대중의 오해
때문에 그런 호칭들을 은밀하고도 매우 조심스럽게 인정하셨다. 그 분의 어떤 동시대인들은 그 분을 다윗의
아들로 이해했으며, 마태와 누가는 자기들이 기록한 족보에서 예수님을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 분이 받아들이고 사용한 한 가지 호칭은 선지자였다.
마태복음 21장 10-11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아온 엘리야(막8:28) 혹은 예레미야(마16:14)로 생각했던 사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또 다른 선지자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그 선지자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를 전파하고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그 선지자가 아니라, 이전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을 가져오는 “그 선지자”였던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신명기 18장 15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성경과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천사, 왕,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스타인에 의하면 사해 두루마리에서 시편 2장 7절과 사무엘하 7장 14절이 논의될 때 메시아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가복음 13장 32절에서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한 또 다른 호칭은 메시아였다. 요한복음 4장 25-26절의
내용을 보면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또한 예수님은 인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호칭은 모든 복음서의 배경 문서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러므로
이것이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와 일을 묘사하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호칭이었다.
스토트에 의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라는 자기 칭호를 118번 사용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내 아버지라고 호칭한 사례가 173회 등장한다고 했다. 그 복음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한 마가복음의 메시지와 확실히
일치한다고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라는 호칭이 17회
등장하고, 천국이 47회나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서는 “나”가 10회, 하나님의
나라가 37회 등장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 등장한
한 청년을 책망하는 내용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다.(요1:41)
나.
기적과 표적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나타난다. 최재선에
의하면 모두 372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 기적의 각각의
경우를 살펴보면 삼위 하나님께서 협력하여 행하신 기적이 50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36개, 천사를 통해 나타낸 기적이 14개, 요셉에게 나타난 기적이 2개,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난 기적이 25개,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기적이 3개,
기드온에게 나타난 기적이 2개, 삼손에게 나타난
기적이 8개, 다윗에게 나타난 기적이 2개, 엘리야에게 나타난 기적이 7개, 엘리사에게 나타난 기적이 14개,
다니엘에게 나타난 기적이 2개, 베드로에게 나타난
기적이 4개, 바울에게 나타난 기적이 5개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나타난 횟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보아야
하며, 모세를 통해 나타난 만나의 기적만 하더라도 그 종류는 한 개이지만 그 횟수는 40년 동안 무려 14,610번이나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기적을 나타내신 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는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요한복음 2장 1-12절)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표면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의를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하였다. 이 기적이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하니, 그것이 예수님의 성역의
영적 성격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표적”이란 그리스도 영광을 알려준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주 만드신 행적이 영적 교훈을 준다고 주장함이 마땅하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예수님의 첫 표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 등등 이런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었다. 성경에는 혼인잔치에 대해서 3군데 나온다. 가나의 혼인잔치, 마태복음 22장에서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이다. 세 혼인잔치는 모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혼인잔치가 끝나기 전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혼인잔치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혼인잔치의 연회장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물항아리가 여섯개가 있었다고
했다. 육은 인간의 수를 나타내는데, 유대인들은 항상 외출하고
오면 사막지대라서 물로 씻어야 했다. 이것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지키던 것이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포도주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과 포도주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물항아리 여섯개에 물을 가득채울
것을 말씀하셨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구약의 율법을 말한다. 아직 복음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이
가득차게 되면 이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5장 39-40절에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으며, 이 성경(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는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항아리는 여섯개인데,『물이 아구까지 찼다』는
것은『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서 스스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발견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율법을 잘지켜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말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라는 말이다. 물은 구약의 율법이지만 포도주는 신약의 마지막 유월절에『새언약인 예수님의
피』라고 하셨다. 새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비밀이 있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새언약이다. 율법으로는 완전한 혼인잔치가 될 수 없지만, 새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새언약)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나이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를 말하고 있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아닌데, 물(율법)이 가득차므로 죄를 깨닫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새언약)로 말미암아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룩한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율법으로 죄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계속 대속하여야 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계속
죽게 만드는 모순적 상황이 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 집에서 포도주 만드신 기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천국이 임한
단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2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던 것이다.
이 사실은 메시야의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 55장 1-5절의 말씀의 성취이다.
거기에서 말하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다.
부활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타자를 만나는 종교이다. 초기 기독교 체험은 이 타자를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만난 것이다. 부활신앙이
기독교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집중적이며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 교인들에게 그들의 회심조건과 회심 모습을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말해주고 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 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이시라” 계속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4절에서 이 확신이 미래 생명에
대한 그들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바울은 5년쯤 뒤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공동체의 설립 기반이 된 “좋은 소식”의 기본적인 뼈대를 다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의
내용을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들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해준 내용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보이셨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체험한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당시에
살아 있어서 그 체험을 입증할 수 있었다. 바울 자신도 체험한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활 체험의 직접 증인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사실적 혹은 심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종교적인 상징을
도구로 기술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9장 1절에 “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사도로 부르심과 연관지어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고 있다. 또 자신의 사도로
부르심을 변호하는 다른 부분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에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세 번이나 나온다. 한번은 직접적인 이야기로
9장 3-9절의 말씀으로, 두 번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에서 나온다.(22장 6-11절과 26장 12-18절) 이
기사들은 세부적인 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9장 7절에서
바울의 동료들은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22장 9절에서
그들이 빛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 이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이었고, 그 결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내용들은 근본적으로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은 초월적이시고 명령하시는 존재로서
예수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분이 명령하시고, 능력주시는 말씀, 이것은 모두 부활 기사의 가장 일관된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를 전하는 도구가 실재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약한 수단이다.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의 체험은 개인적인 능력을 행사하던 또 다른 주체에 대한 체험이었다. 사도행전 기사에서 그 목소리가 바울에게 묻는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때 사실 바울이 핍박한 대상은 인간 예수가 아니라 메시아 공동체였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라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살아계시고 메시아 공동체 안에 능력있게
임재하시는 분으로 체험하였던 것이다.
복음서에는 두가지의 기본적인 부활의
기사가 나와 있다. 첫 번째는 빈무덤 기사이다.(막 16:1-8, 막 28:1-8, 눅
24:1-11, 요 20:1-10) 추종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후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가서 예수님이 거기에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달한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전달자에게서 들었다. 돌이 사람의 힘으로 굴려내기는 너무 무거웠다. 무덤이 빈 사실은 찾아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주된 논점은 예수님이 죽음의 장소에 있지 않으시고 그들보다 앞서 가셨다는 것이다. 빈 무덤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 기사들은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공개되어 있었다. 그 분은 장사지낸 곳에 계시지 않았으며, 그 분의 새 삶은 시공간적으로
정확한 제한을 받지 않았다. 뒤에 남은 수건은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된 한 사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20장 6-9절에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부활기사의 두 번째 종류는 출현기사이다. (막 16:9-20, 마
28:9-20, 눅 24:13-49, 요
20:11-21:23) 이 기사들은 예수님의 몸의 실재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지금 살아계시는
이 분은 전에 죽으셨던 분과 다른가 같은가? 예수님이 죽기 이전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영화로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이전의 몸은 죽어야 하는 몸이지만, 부활한 이후의 몸은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이다. 몸이라는 차원에서 육의 몸에서 영의 몸으로 전환된 것이다. 영으로서는 동일한 분이지만 몸으로서는 다른 몸임을 이해할 수 있다. 부활의
몸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변신이 가능하며, 시공간을 초월한다.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부활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놀람
그 자체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벽을 뚫고 들어오셨다. 제자들이
있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뿐만 아니라 거기 나타나신 예수님은 이전 분의 그림자가 아니라 능력이 많으시고 명령하시는 모습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두드러진다. 예수님은 성경을
해석해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부활체험은 복음서 기사에만 제한될 수 없다.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체험과 확신은 무덤도 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환상도 보지 못하였던
사람들에게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강력한 임재에 대한 체험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활에 대한 이런 이해가 복음서에 표현되어 있다.
요한복음 20장 20-23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분명 제자들에게 능력 주심이 성령에게서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이 성령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직접 나오며, 제자들은 이 능력으로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복음 24장 47-49절의
말씀도 유사하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4절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말에 이어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베드로는 첫 번째 설교에서 말한다. 사도행전 2장 12-13절에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38절에 따르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성령은 신자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행하였다. 갈라디아서 3장 3-5절을
보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섞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믿고 들음에서냐”
그리고 신자들의 인식 변화를 가져다 주는 주체도 성령이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이 성령은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다. 생명을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이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고린도후서 3장 17-18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2절과 16절에서
성령과 주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는 먼저 성령의 기원을 말하고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말로서 논의를 마친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1절에 다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예수님이 잠시 생명을 회복해서 추종자들 일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확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수년 후에도 계속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으로 검증된 그분의 새롭고 능력있는 양식으로 살아계신다.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하고 계신다는 확신이다. 그 분은 영을 통하여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룩 존슨)
부활에 대한 요한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라고 질문을 했다.
예수께서 대답하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침에 놀라더라.
이 글은 출애굽기 3장 106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조상의 하나님이 아닌 산자의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다. 산자의 하나님이란 언약의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조상의 혈통인 죽은 자들 속에서
나타났던 과거의 하나님이 아닌, 영으로서 부활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의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혈통으로서 아브라함이 아닌, 믿음으로 영생을 약속받은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0-11절의 말씀을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신비스러운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5장 35-44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하리니 “어리섞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
라고 하고 있다. 부활은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으로 갈아입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였으며, 거듭난 자는 영의 몸을 입고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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