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열두 사도시대의 선교
18. 열두 사도시대의 선교
(1) 열두 사도
마태복음 10:2-4에서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베드로는 시몬이라 불렀으나 예수님이 베드로(반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다. 반석은 히브리어 페트라에서 왔다.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보다 권위는 아래였다. 신약에서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기록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또는 형이다. 성경은
형제로 나온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심이 아니라 정학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전승은 그가 러시아로 건너가 선교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성경 속에서 의외로 적게 나오면서 입지가 작다.
초대교회 문헌 속에서도 안드레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세베대의 아들 큰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이다. 대 야고보로 부른다. 보아너게(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다. 최초의 순교자다. 헤롯 아그립파에게 순교
당한다. 베드로는 풀려나와 복음을 전한다.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 사도이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요한 서신의 기록자이다. 혹자는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보기도 한다.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다. 바돌로매의 소개로 예수님께
왔다. 그리스에서 선교하다 순교 당한다. 그의
묘가 터키의 파묵칼레에 있다고 한다.
바돌로매, 혹은 나다니엘이라고 한다. 두 가지의 이름이 너무 달라 종종 헤갈린다. 어느 것이 본명인지
정확하지 않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채 머리를 베어 순교 당했다.
도마는 디두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뜻은 쌍둥이다.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다. 인도에서 순교했고, 신라까지 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아직도 인도에 도마교회가 있다고 한다.
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했다. 금융업자의 수호신이다. 세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야고보(알페오의 아들)은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님의 동생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논쟁이 많다. 개신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 야고보를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촌과
친 동생이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다대오는 다대오 출신의 유다이다. 다대오로 자주 부른다.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 유다란 뜻이다. 가룟 유다는 그냥 유다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불렀다는 점이다. 유다는 찬미하다의 뜻이고, 다대오는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 이름으로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시몬은 베드로의 동명이인이다. 알패오의 아들이며, 소(작은) 야고보의 형제다. 열심당원출신이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순교했다.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몸이 잘려 죽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알패의 아들은
유다와 시몬 둘이 된다.
가롯유다는 유대지역 출신이다. 다른 사도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지만 유다만은 유대 지역 출신이다. 가장 머리가 좋고 회계를 맡았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자신은 자살한다. 이 자리를 맛디아가 대신한다.
열두 사도 중에서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 제자들은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맛디아라는 사람을 택하여 세웠으나, 성경에는 맛디아의 흔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사도로 세운 것이다.
(2) 사도바울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의 연배는 예수님보다 서너 살 아래고, 다른 예수님 제자들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눈으로 예수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제자들보다 위대한 복음 증거자의 삶을 살았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믿어야 했던, 또
믿어야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란 이름은 헬라식 이름으로 작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로 이름을 바꾸기 전 유대식 이름은 사울인데, 그 뜻은 여호와께 구하다, 요구하다, 희망하다’이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1차 전도여행 중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사울이란 유대인 이름 대신 바울이란
이방인 이름만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의 바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특별한 배경을 갖고 태어났다. AD 1년경 지금의 터키 남동부지역인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출생했다. 즉 유대 본토에 사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즉 부친이나 모친
한쪽이 이방인이 아닌 순수혈통의 이스라엘 족속이었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할 만큼 그는 히브리신앙의 엄격한 규율 안에서 성장했다.
바울의 부친이 부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들을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내어,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게 한 점이다. 그리고 바울이
그 당시로서는 쉽게 얻기 어려운 로마시민권을 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부친이 로마제국에
큰 공을 세웠거나 아니면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철저한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면서, 동시에 로마시민권을
갖고 이방세계에서 태어나 헬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장차 바울이 복음 사역을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그의 스승 가말리엘 랍비는 헬라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비교적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부활과 천사 그리고 그 밖의 성경의 근본적인 신앙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바울의 스승으로서 이상적이었다.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사도직을 수행했으며, 천막 제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구애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행23:16에 보면, 유대인들이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암살하려고 하는 정보를 그의 생질이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보아 그의 누이가 예루살렘에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일평생 그 육체의 가시로
고통 받는데, 구체적인 병명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바울이 이 가시를 제거해 주기를 주님께 간구한 점과 또 이로 인해 바울이
겸손해 질 수밖에 없었음을 볼 때, 단순한 병은 아닌 것 같다. 육체적인 것인지, 심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바울의 성품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품을 지녔다. 그는 이성과 영력을 아울러 지닌 사도이다. 그리고 불타는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에 부드러운 정서와 여성다운 온화한
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활달한 기상과, 투철한 사명감과 강한 윤리 의식 존엄한 정의감이 곁들여, 인간으로서 존귀한 성품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1) 바울의 서신
바울의 서신 가운데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는 것이 바로 옥중서신이다.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 감옥에서 조차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은 한 위대한 헌신자를 보게 된다. 그는 약 20년간에 걸친 전도 여행을 목숨을 걸어놓고 쉼 없이 달려갔다. 한마디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 넣은, 그 어떤 장애물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던,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다.
2) 그러면서 그는
동역자와 함께 팀을 구성해 선교 활동에 주력한 것을 볼 때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구제헌금을 할
때도 강제성을 띠지 않고 자발적인 참여를 촉구할 만큼 매사 무리 없이 진실 되게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신앙이 잘 자라도록 서신을
통해 계속해서 돌본 것으로 보아 성도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투철했던 사람이다. 또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시간을 바쳐 헌신하면서도 밤낮으로 일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림으로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아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3) 그런데, 그의 체격은 정신세계와는 달리,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무시당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체격은
왜소했을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목숨을
내건 고된 전도 여행을 하면서 심한 탄압과 핍박을 능히 견디어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4) 그의 설교는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은혜로 충만하여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언변보다는
문필에 더 뛰어났다. 바울은 교회내의 많은 문제들과
개인적인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관련 계시에 비추어 적절한 답변을 제시해 줌으로써 기독교인의 삶의 표준을 제시해 준 명설교가였다. 그의 서신에 보면 추상같은 질책과 함께 따스한 인정이 뒤섞여 있다. 그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한 설교의 논지를 채택하고 설교 방법을 달리할
만큼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뛰어난 사고력을 소유한 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의 공생애에 대해 체계 있게 설명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세웠으며, 교리서신, 옥중서신, 목회서신 등 분량 면에서 볼 때, 신약성경의 1/3 가량(13/27)을 저술했다.
5) 그에게 결점이
있다면 너무 성급한 점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도여행 시 도중하차한 마가의 실수에 대해 용서치
않고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따로 전도 여행에 나설 만큼 과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긍정적으로 보면, 큰일을 위해 사소한 인정을 버리고 매진하는 진취성과 아울러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 결코 간과치 아니하는 준엄한 성격의 소유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6) 그는 완전한 자유인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세우기는커녕
모든 부류의 사람들 앞에 종 된 심정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보아 매우 겸손한 자. 주님은 이런 그를
이상 중에 불러 하늘나라를 보여 주셨다. 하지만 그는 14년이 지난 후에 자기 말이 상당히 먹혀 들어갈 때를 기다려서 신중히 발설하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의 광경을 보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의 종으로서
이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본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주님으로부터
창세 전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역대 하나님의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시련을 겪은 사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울이다. 그는 사울에서 바울이 된 후로
순교할 때까지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역사에서 그만큼 비중이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바울의
행적에서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크게 들어 쓰셨으며 그의 사명이 얼마나 중차대했겠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쓰러뜨리려고 그야말로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는 앞날이 촉망되는
인물로 명예와 지위가 그에게 약속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처자식을 거느리고 유명한 율법사가 되어 평안히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먹고 입을
걱정이나 시련에 시달릴 까닭이 없었다.
그가 주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뜻밖에도 주님의 부름을 받아, 하루아침에 주를
증거하는 새 일꾼으로 180도로 전향하게 되자, 수고를 넘치도록 전도했던 것이다. 그는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 했으며, 여러 번 곤장을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가운데 헐벗고 굶주리며, 떨면서도 늘 교회를 위해 염려했다. 그는 실로 이러한
연단 속에서, ‘정금보다 귀하게
되어(사13:12)’ 자기의 갈 길을 다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같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가?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복음이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행위로 구원받을 인생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오직 한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으로, 성령의 사람은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자이다. 바울은 주의 사랑이 강권하여
이 놀라운 생명과 소망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 외에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윤리가치의 체계와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제시함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여, 기독교와 교회의
기틀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 이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AD 63년경에 석방되었고, 네로의 박해 때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울은 30대 초반에 회심하여, 아라비아를 거쳐
다소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1차 전도여행을 시작으로 50대 후반에 로마로
향하게 된다. 로마 수감생활에서 풀려났을 때
서바나(스페인)를 방문했을 것으로 보며, 두 번째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60대 중반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리스도 앞에서 약한 자였던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강한 자가 되었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가는 정열적인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
바울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태동한 교회가, 사도들을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 제국 전역에까지 전파되어 갔던 초대교회 당시에, 처음에는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 회심한
후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대인의 온갖 핍박과 또 로마제국의
박해를 극복하며 기독교의 세계적 전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대 사도이다.
(3) 초대교회(안디옥) 활동
A.D. 70년과 A.D. 134년에 일어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기독교에 반감이 증대하였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 율법을 준수하던 초기 유대인들은 유대교
내의 분파로 여겨졌다. 하지만 세기 말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핍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던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저주받고 추방되었다. 이런 가운데 교회 내에 이방인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적 요소들은
기독교회를 유대 문화 안에 머물게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유대 문화에서 배척받은 기독교회는 대부분의
유대교 전통들을 거부하였다. 현실적인 면에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교회가 되어갔다.
폴 피어슨에 의하면 회당은 초대교회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회당에 대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에 평범하고 느슨한 조직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통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작은 그룹을 형성하여 토라를 공부하였고, 자연스럽게 회당이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모든 중요 도시에 회당을 설립했는데, 특정지역에
회당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경건한 사람 10명만 있으면 되었다. 10명이
되지 않으면 기도처로 모였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기도처를 방문하여 복음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디아스포라들이 모이는 큰 회당이 있었다. 그 곳에서 70인경이 번역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1세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거의 대부분 도시들에는 회당이 있었다. 그만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전역에 흩어져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교량역할을 감당하였다. 회당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속해 있었는데, 첫째, 경건한 유대인, 둘째, 유대교 개종자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과 동료들은 그들에게 가서 메시야가 이미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일부는 믿었지만 대부분 믿지 않았다.
유대 개종자들은 이방인으로 성장했지만
유대적인 신앙을 수용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유대적인 신앙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이방인들이 믿는 다신 신앙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유일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 사도행전 10장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를 통해서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유대적인 윤리 기준을 따랐지만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준수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회당의 정식 직원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백부장 고넬료이다. 그들은 바울이 방문한 도시교회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갔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을 찾아갔다. 피어슨에 의하면 이러한 이유는 신학적이며, 전략적인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회당으로 찾아갔으며, 메시야가
오셨음을 선포했는데, 일부는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했지만 다른 사람은 거절하여, 회당은 신자와 불신자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회당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조직체를 갖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 제자들이 이방인 교회로부터 점점 더 격리되어
갔다. 유대인 교회들은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강화해 갔으며, 그런
유대인 교회들은 3-4세기에 이르러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3세기에는 영지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영지주의는 지식을 강조한다. 영지주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핵심적인 가르침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라는 것이었다. 이 기본 전제는
첫째, 구약에 나타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악한 신이다. 둘째, 성육신은 날조된 것이라고 했다. 성령 하나님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포함해서 모든 물질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영지주의의 논리는 예수님을 유령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지않았고,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구속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지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한데,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영적 지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영지주의는
교회를 괴롭혔다. 특히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을 비판한다.
최초의 이방인 교회는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 세워졌는데, 사도행전 11장 19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스데반 순교 직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4세기에 이르자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으며, 당시 안디옥은 인구가 50만 명 정도의 도시였으며,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기독교 신자라고
하니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안디옥에서 기독교 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기독교의 가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4세기가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로마인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로마의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인의 정의를 변화시켰다. 기독교인은 정당한
종교기관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4) 로마제국에서의 선교
3세기 말에 기독교 인구는
로마제국에 사는 인구 중의 약 10%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핍박의 물결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높은 수준이었다. 3세기 중반 발레리아노 황제 통치기간과 4세기 초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극한 핍박이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4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프
장군은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프가 정권을 잡은 후에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기독교인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였으며, 그 결과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동등한 법적 기반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그
후 323년 그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370년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로마는 기독교를 수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교회는 독보적인 교회로 자리잡았는데, 325년에 소아시아에서 열린 니케아 회의는 최초의 대규모 세계교회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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