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로마의 기독교 공인

 

19. 로마의 기독교 공인

 

(1) 니케아 신조

 

초대교회는 오랜 갈등과 시련 그리고 고난과 박해 이후 313년 동방의 리카리우스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사이에 맺으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회는 새로운 활력과 최대의 자유가 찾아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자유화한 뒤 몰수된 기독교의 재산을 반환하고, 교직자에게는 국비를 보조하고,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하여 선포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와 혼합한 제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들과 좋은 관계들을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안에는 내분과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의 힘을 빌어 공존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내분을 막아야만 했는데, 당시 교회내에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약 300년동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로 믿는 분명한 삼위일체의 교리가 제정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시련과 핍박 때문에 교리적인 체계를 세울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러한 교회내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황제는 325 5 20일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공회를 니케아에서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고, 그 회의는 2개월이 지난 7 25일까지 진행되었다. 니케아는 소아시의 작은 동네 보스프러스((Bosporus) 해안에 있으며, 당시 회의가 있었던 지명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동질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니케아 신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니케아 회의는 멀리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교회의 감독들까지 불러 모았다. 니케아 회의가 열릴 때만 해도 로마교회의 감독이 그리 두드러지게 높은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로마교회 감독이 최고의 위용을 갖추고 모든 다른 감독들 가운데 수장의 자리를 주장하였다. 로마시대 교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에서 성장하고, 교회 예식에 참여하고, 비교적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면 되었다. 당시 로마문화는 타락한 문화였다. 노예제도도 있었고, 검투사들의 검투를 즐기는 문화였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순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명목주의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일부 신자들은 보다 철저한 신앙생활을 지켜나감으로서 살아있는 “순교자의 삶”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2) 수도원 운동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 운동은 3-4세기에 걸쳐 시작되었으며,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사막으로 들어가 기도하며, 간소하게 살면서 금욕적인 수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독신자로 기도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피어슨은 수도원 운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영적인 깊이, 심층적 제자도, 그리고 영적 갱신을 추구하였으며, 교회의 형식주의와 제도 존중주의와 명목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지만, 부정적인 견해는 육체를 경멸하는 성향이 있었으며,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강조했는데, 수도원 운동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강조했다.  

 4세기 후반 수도원 생활은 더욱 발전을 하여 일부 수도자들은 예배를 드리고, 일하고, 일부는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수도원의 초점은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 예배, 그리고 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에 있었다. 수도원에는 지식있는 노동력이 풍부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유해졌다. 수도원이 설립되어 시간이 흐르자 수도원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해서 부를 축적해 갔다. 수도원이 부유해진 원인은 양질의 노동력 외에도 여러 귀족들이 다른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했는데, 귀족들이 사망한 후에 그들의 영혼을 위해 수도승들이 기도해주는 조건으로 재산을 헌납한 것이다. 이런 풍습은 중세교회의 연옥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된다. 중세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연옥에 가는데, 반드시 수도승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야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수도원이 간혹 정치 세력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귀족 출신의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 되기도 했다.  

 

(3) 유럽지역에서 선교 

 

 아일랜드에는 기독교인들이 일부 살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이교도 국가였는데, 켈트족 민간 신앙은 풍요에 초점을 둔 다신교 신앙이었다. 그 제사는 성전 매춘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예배자들은 예배행위의 일부로 남창이나 여창을 이용하였다. 이외에도 제사와 함께 유아 희생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패트릭과 제자들이 아일랜드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기독교를 확장해 나갔으며, 그는 이후 스코틀랜드, 영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독일로 가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따라서 수도원의 중심은 아일랜드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켈트족 수도원은 급속히 성장했으며, 선교본부로 삼았으며, 패트릭이 사망하기 직전에는 아일랜드가 거의 복음화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패트릭의 영적 후예인 콜롬바는 스코틀랜드를 거쳐 “아니오나 섬”으로 들어가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오나 수도원은 선교의 기지가 된다. 켈트족 선교사들은 섬을 가로지르는 곳에 여러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마지막 종점은 영국의 해변인 린디스판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은 로마화한 영국에서부터 아일랜드로 전파되고, 한 세기가 지난 다음, 켈트족 수도승들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신선한 복음의 생명력이 뿜어져 나와 로마 문화를 따르지 않았던 원주민들과 부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켈트족과 로마교회는 문화적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선교운동을 독립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로마교회에 예속시켜 할 것인가가 그 당시의 이슈였다고 한다. 켈트 지도자들이 어거스틴을 만나러 왔을 때 영국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에는 권력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피어슨은 분석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켈트족의 교회를 로마교회의 권위아래 굴복시키고, 영국교회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가 하나로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 개종과 영국교회의 통일은 지연되었으며,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수세기 동안 존재하는 적대감도 더욱 복잡하게 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664년 휘츠비(Whitby)종교회의에서 켈트족 지도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협박에 못이겨 로마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모든 영국 군도의 교회가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콜롬바누스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했으며, 후에 프랑크 왕국을 세운 프랑크인들에 대해서 선교조직체를 이용해서 영적 갱신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콜롬바누스의 선교는 훌륭했지만 지역을 관할하는 감독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황실은 명목상으로는 기독교를 표방하였지만 콜롬바누스가 통치자들의 부도덕을 꾸짖을 때에 황실은 그를 프랑스 밖으로 추방시켜버린 것이다. 마침내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수도원의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은 변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힘을 잃고 혼돈 속으로 무너져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로마제국은 기독교와 동일시하였다. 그것이 로마 사람들이 가진 명목상의 신앙이었다. 기독교 왕국은 이슬람교와 바이킹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패배를 하게된다.  

 당시 로마제국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원래 로마제국은 지중해 동부 과거 알렉산더 헬라제국의 영토들인 헬라반도와 소아시아 반도 그리고 시리아, 이집트, 유다, 지중해 서부의 북 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 에스파냐,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 등 기존 영토에 이어 영국영토인 브리타니아와 라인강 서쪽의 독일 땅 게르마니아, 그리이스 북쪽의 루마니아가 된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는데, 이러한 영토확장은 로마제국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으나, 로마제국의 시민들과 시민권 미소유자 사이에는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게 되었다. 황제 테오도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로마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보고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던 것이다. 서쪽을 서로마제국, 동쪽을 동로마제국, 이후 비잔틴제국이라고 한다.  

 

(4) 동서 로마 시대의 교회

 

동로마제국은 7세기 초만해도 크고 강력했다. 이집트, 소아시아, 대부분의 중동지역, 그리고 북아프리카 일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이슬람교가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에 있었던 헤지라는 이슬람교의 시발로 간주되는데, 10년 후인 632년에 마호메트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여러 지역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2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1년 뒤 안디옥, 두로, 지중해 연안도시를 점령하였다. 그 후 10년 이내에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였고, 소아시아로 쳐들어갔으며, 673년에서 678년 사이에 거의 전역을 정복했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까지 살아남았지만 세력이 아주 약화되었으며, 715년까지 무슬림 정복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거의 대부분 정복하였다.  

 이들 지역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이탈리아로 떠났으며, 나머지는 무슬림 땅에 그대로 남았다. 무슬림 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교회는 이집트의 콥교회였으며, 다른 교회들도 여러 지역에서 살아남았다. 북아프리카 교회와 중동지역의 교회들은 다른 교회와 교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두었다. 핍박하지도 않고, 이슬람으로 개종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특별세를 내야했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 결과 여러 곳에 있던 교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는 분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회가 소멸된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동로마 제국과 강한 일체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동로마는 교황권이 강하였고, 서로마는 약하였다. 로마주교와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에 비하여 훨씬 독립적이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과 교회의 친밀한 동일감으로 인해서 북아프리카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정복자들을 부패한 기독교 국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해방자로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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