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중세 시대 기독교

 

20. 중세 시대 기독교

 

(1) 바이킹의 침략과 교회의 타락 

 

 9세기에 유럽은 바이킹의 계속적인 침략을 받았다. 바이킹은 옛 스칸디나비아 사람들로서 현재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지역의 출신들이었다. 바이킹은 이교도들이었지만, 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다른 부족들과는 달랐다.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부족들은 로마제도를 수용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바이킹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잔인했고, 도시와 성체들을 습격했으며, 수도원과 교회를 약탈하였다. 사제들을 죽이고 수도승을 노예로 만들었다. 바이킹은 프랑스에서 성직자들을 삼분의 일을 죽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교회의 입장에서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846년 무슬림은 로마를 약탈하고 성 베드로 성당을 불태웠다. 871년부터 899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알프레드 대왕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덴마크 바이킹을 물리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였으며,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는 영국에 종교와 지성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혼돈의 시대에 그는 교회를 조직하고 학문을 증진시켰다. 영국이 선교의 본산지가 된 것이다. 영국 선교사들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게 복음을 전파시켰다.  

 유럽은 바이킹의 침략이 있은 후에 신성로마 제국이 생겨났다. 찰스대제 혹은 샤를마누 대제는 732년 무슬림 침략군을 물리치고 현재 프랑스와 독일 땅을 통일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은 그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왕관을 씌워주었다. 찰스대제는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내에 있는 교회에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그는 영국 요크에서 알쿠인을 불러왔는데, 알쿠인은 켈트족 교회 전통을 가진 지도자로 교회를 개혁하였다. 그는 학문을 강조하고 효율적인 행정을 도모했지만, 찰스대제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들이 제국의 여러 부분을 물려받은 후에 888년경에 제국은 분열되고 마는데, 이것이 크다란 권력공백을 야기하면서 서유럽은 혼란과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새 수도원이 클리뉘(Cluny)에 설립되었는데, 현재 프랑스 브로고뉴 지방이다. 이 수도원은 교회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 때까지 수도회 제도는 없었다. 수도원들은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상호 조직적인 연결도 없었다. 따라서 주교나 귀족들이 수도원을 쉽게 지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수도원의 부패와 쇠퇴의 원인이 되고 만다. 수도원제도를 통해서 모든 수도원과 수도사의 집들이 하나의 중심 권력 아래 연결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교회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가 나타나게 된다. 당시는 국가 개념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던 시기였다.이 시기에 십자군 운동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운동은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 여러 곳에서 온 군인들과 순례자들은 함께 행군하며 일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국가관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회 제도는 부유해졌다. 부와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약해져 갔던 것이다. 초기에는 수도원에서 참된 기독교의 삶을 추구하기 원하는 곳이었으나,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깊은 신앙생활을 추구하다가 교회를 갱신하고 부흥을 일으키고 사회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던 것이다.  

 11세기 말에는 클리뉘 수도원이 설립된지 한세기 반이 지날 무렵 클뤼니 소속 수도승인 힐데브란트가 교황이 그레고리 7세로 선출이 되었다. 그는 성직자들에게 독신주의를 강요하고 싶어했으며, 평신도 귀족들이 주교를 임명하는 관행을 막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목표는 다 이루지 못하고 수세기 동안 사제들에게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 법적으로 결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힐데브란크 교황은 주교를 서임할 때 지역 귀족이 주교에게 하사하는 관례를 없애려고 했는데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힐데브란트는 역사상 가장 높은 교황권을 주장했는데, 교황과 국가가 수세기 동안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11세기말에 클뤼니 수도원이 쇠퇴하자 새로운 수도회 제도가 탄생했는데, 1098년에 설립된 시토파 수도회였다. 시토 수도회는 금욕주의적 고행과 신비적인 경건으로 성장했다. 수도승들은 규정식을 먹었다. 그들은 공동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언제나 촛불을 켜놓고,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도록 옷을 입고 잤다고 한다.  

 

(2) 십자군 운동과 십자군 정벌 

 

. 십자군 운동의 원인들 

 

 1) 종교적인 원인 

 

 신학이 문제였다. 중세신학은 죄에 대한 두가지 형벌이 있었는데, 영원한 형벌과 일시적인 속세의 형벌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사거나 남을 위해 사면 그 사람의 모든 죄의 일시적 형벌이 용서받고, 연옥에 있는 영혼이 즉시 석방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하나님을 떠난 죄)의 영원한 형벌을 치르셨고, 각 개인은 그 후에 살면서 짓는 죄들에 대해서 일시적 형벌을 치러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충분히 고행을 하든지, 아니면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사상에 따르면 이것은 연옥의 불가운데 수천년 동안 고통하며 보내는 것을 의미하며, 전형적인 중세 카톨릭 교인들은 지옥보다 연옥을 더 무서워했다고 함 

고백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게 되면 신부는 어떤 고행을 해야할지 처방을 내려주었다. 성도는 사제의 처방에 따라 자선행위를 하거나 특정 성지를 찾아 성지순례를 하거나 몇 번 동안 기도를 해야하거나, 성인이나 순교자의 성골 혹은 성물을 경배해야만 했다. 고행을 충분하게 하지 않으면 남아있는 분량은 연옥에 가서 채워야만 한다고 믿었다.  

 

 피어슨에 의하면 성지순례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십자군 운동에 나타난 정신이다. 중세 전반을 통하여 사람들은 성인들의 유골을 모신 특별한 성당을 순례하고 경배했다. 특히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흔적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교회는 이런 유물들을 경배하는 것이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단축시켜 줄 것으로 말했다. 그런데 무슬림 세력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수세기 동안 성지순례를 허용했지만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고행을 대신할 선행으로 십자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게 된 것이다.  

 

2) 경제적인 원인 

 

 970년부터 1040년까지의 48년 동안 기근이 들고, 1085-1095년 사이에 사정은 더욱 나빠졌으며, 세기 말에 이르자 빈곤과 사회 불안이 극에 달했다. 당시 유럽에는 인구가 너무 많고 사람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귀족자녀들 가운데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자녀들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들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혹은 탐험가로 가는 것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혼돈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였다. 

 십자군 운동의 목표는 터키 무슬림이 지배하는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동방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4차 십자군 원정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로마제국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은 터키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교회는 분열했다. 

 1054년 교회는 공식적으로 동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 분열에는 성령론이 문제였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오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 양위로부터 오는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인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사실은 로마의 주교가 전체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제국의 중심지를 자신의 이름을 붙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이 전 세계의 교회를 다스리는 수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1054년에 갈라진 후로 교권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1096년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 우르반 Ⅱ세로부터 도움을 요청했다.  

 

. 십자군 정벌 

 

 교황 우르반은 제1차 십자군 정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제공하였다. 면죄부는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 전부나 일부를 탕감받을 수 있는 증표였다. 무조건적 면죄부는 모든 세상적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증표이기에 이 면죄부를 가진 사람은 연옥을 거치지 않고, 이 땅에서 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6세기에 자행된 면죄부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시발점이 된 것이다.  

 1차 십자군은 무장한 성지순례였다. 군인들과 함께 군인들과 맞먹는 숫자의 일반시민들이 함께 갔다. 십자군 운동은 상당부분 대중적 광신도들이 참여하는 것이었다. 십자군은 유대인을 공격하여 수천명을 살육하였다. 십자군 정벌은 계속되었다. 첫 번째 정벌은 성공적이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주민들도 죽였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닥치는대로 죽였던 것이다. 4차 정벌에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보물을 약탈해갔다. 동로마 교회를 위해 라틴계 교회를 세우고 로마교회에 예속시켰다. 이 사건은 동방교회를 서방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무슬림은 힘을 재규합하여 서구인들을 몰아내게 된다.  

 

(3) 수사들의 선교운동 

 

. 도미니쿠스회 

 

 기독교 역사에 성 도미니쿠스로 잘 알려진 “도미니쿠스 데 구스만”은 1170년 스페인 카스티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주였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개혁적인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기 교구 내에서 행정과 도덕적인 개혁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도미니쿠스는 훌륭한 영적 훈련을 받았고,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사로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수사들은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훈련 방식을 따라 살았다. 그런 까닭에 도미니쿠스는 사제 공동체에 속해 있었으며, 영적 수련, 도덕적 순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추구하였다. 1206년 도미니쿠스는 감독의 프랑스 선교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집을 짓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단자들을 개종시켜 바로잡아 교회로 돌이키기 위해 성결, 사랑, 그리고 청빈서약을 하였다. 그들은 무력사용을 거부하였다. 권력자들이 이단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십자군을 출병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도미니쿠스 공동체는 강제 해산을 당했으며, 그와 감독은 스페인으로 강제 소환당했다. 감독은 죽었지만 도미니쿠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프랑스 남부로 돌아갔는데, 현지 감독이 도미니쿠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1216년 교황은 마지못해 새로운 수도원을 허가했던 것이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출신 1기 유럽 선교사들은 모두 16명이었는데, 피어슨에 의하면 그들은 군대처럼 이동성을 갖추고 사역을 하였다고 한다. 도미니쿠스는 그들을 파리, 볼로냐, 로마, 스페인 돌로레 등지로 흩어져 사역하게 하였다. 수도회는 여러나라로 퍼져나갔으며, 설립 후 4년만에 8개의 나라에 조직되었고, 60개의 숙사가 세워졌다. 21년이 지난 다음 수도회원 중 한사람이 추기경이 되었으며, 1276년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원이 교황이 되었다. 세기가 끝나기 전에 404개의 숙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후 도미니쿠스회는 페르시아에서 활동하게 된다. 베네치아 무역상인 두 형제 니콜로 폴로와 마태오 폴로가 있었는데, 그들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들의 최초 동쪽 여행은 1260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1269년 기독교인 교사들을 보내달라는 중국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중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왔으며, 1271년 도미니쿠스회 소속 선교사 두 사람이 폴로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동행했으나 돌아오고 말았다.  

 

. 프란치스코 수도회 

 

 프란시스코라는 사람은 포목상을 하던 부잣집 외아들이었으나 삶의 목표가 없어 방황하던 젊은이였다. 그는 전투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낸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204년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위기상황을 겪으며 점진적인 개종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프란시스는 로마로 순례여행을 갔다. 로마에는 그 당시 낡은 성당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성당보수를 하면서 2년을 보냈다고 한다. 프란시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프란시스파는 조직도 전혀 없었으나 복음서대로 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 절대 청빈으로 살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 당시 선교적으로는 가장 탁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이집트로 가서 십자군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이슬람교 군주들인 술탄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술탄들은 그를 성인으로 여기고 정중하게 영접하였다. 프란시스는 다른 프란치스코 수도승들을 무슬림에게로 가서 전도하도록 파송하였다. 그러나 무슬림 지역으로 간 선교사들은 대부분 순교를 하게 된다. 교황은 이 무렵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1216년 프란치스코회는 “작은 형제회”로 조직되었는데, 작은 형제회이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같은 사랑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다른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간소한 조직에서 복잡한 신학기관으로 변모를 하게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규정을 스스로 느슨하게 하여 돈과 재산을 기부받게 되었으며, 아주 부유하게 된다.  

 프란치스코회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17개의 선교기지를 세웠다. 선교사 중에 “몽테코르비노의 요한”이라는 자는 프란치스코회 소속 선교사로서 1294년에 중국에 도착했다. 1305년 그는 교회를 설립하였고, 교인이 6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368년 선교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던 몽고제국이 멸망하고 명나라가 등장하자 중국에 교회를 세우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중국에서 교회는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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