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개신교 시대
21. 개신교 시대
(1) 청교도 운동과 경건주의
운동
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
1) 루터
루터는 1483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나 광산업자가 되어 경제력을 갖게 되었고, 신분도
상승하였다. 1501년 마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구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수도사로 입문한지 2년만에 1507년 4월 3일 신부로
서품을 받게된다. 그는 1510년 말에서 1511년 4월까지 수도원의 임무인 성지순례를 위해 걸어서 알프스
산을 넘어 로마로 갔다. 루터는 로마에서 사제와 감독들 사이에서 성행하는 부패와 타락상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1515년 루터는 수도원에서 학감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수도원 산하에 있는 11개의 수도원 총감독이 되었다. 1517년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인 요하네스 테첼(Tetzel)이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는데, 면죄부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격노했으며, 이런 면죄부는 루터가 믿게된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에게 “만일 교황이 연옥에 있는 불쌍한 영혼을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데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반박제안을 하면서 반박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여 비텐베르그 교회의 문에 붙인 것이다. 그 후
1520년 루터는 유명한 세편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첫째의 논문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인데, 루터는 교황이 교황권을 행사하기 위해 쌓아놓은 세가지 부벽이 있는데, 이제 그가 세가지 부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세가지
벽 중 첫번째는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이다. 모든 신자들은 사제들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주장은 가치가 없으며, 이것은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둘째는 루터는 교황뿐만 아니라 세속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도 의회를 소집하여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루터는 사제들의 결혼, 탁발수도회의
구걸금지, 창녀촌 폐쇄, 그리고 엄청난 감세와 교회 직분자
감축을 포함한 교회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한 것이다.
두번째 논문은 “교회의 바벨론 감금”으로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반박한 글이다. 성례의 유일한 가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로 그리스도와 사죄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7가지
성례가운데, 2가지인 세례와 성만찬만을 인정하고, 성지순례, 공덕 등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믿음으로 거저 받는 사죄의 약속에 대한 대체물이라고 지적하였다. 세번째 논문은 “크리스천의 자유”였다. 이 논문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자유로우며,
율법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개인적 관계 안에 있기에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후 1521년 루터는 황제와 제국의 최고회의(보름스)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여야만 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사상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고 확실한 이유없이는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후 루터의 개혁운동은 신속하게 퍼져나간 것이다. 카톨릭
군주들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터키족이 서유럽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터키를 물리치기 위해 개신교의 진압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스칸디나비아로 간 루터 선교사들은 중세 기독교 왕국 선교패턴을 따랐는데, 그들은 군주를 새로운 루터교 신앙으로 인도하고, 교회를 개혁하였다. 그들은 루터 운동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로 전파하였으며, 이들 나라들은 루터교를 국교로 수용하게 된다. 이런 기독교 왕국
패턴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사람을 가르치고 교회를 재조직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런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2) 칼빈
1536년 개신교 종교개혁이 19년 동안 놀랍게 퍼져나갔다. 쯔빙글리(Zwingli)는 취리히가 개혁사상을 수용하게 하였으며, 중부 유럽에는
여러 개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칼빈은 1509년 7월 8일 프랑스 파리의 작은 마을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감독의 비서로 교회
재정을 관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평민이었지만 감독과 귀족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었다. 칼빈은 고향 귀족 자제들과 함께 동반하였으나, 얼마 후 칼빈의 아버지는
감독의 신임을 잃게 되고, 그의 아버지는 칼빈을 1528년
오를레앙(Orleans)대학으로 보내 법학을 배우게 하였다. 그
대학 교수 가운데 한 분이 비밀리에 루터교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개신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 강요』(1536년)라는 책을 쓰게 된다. 피어슨에
의하면 그 책에서 자신이 “갑자기 개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쓴 이유는 첫째, 성장하는 프랑스 개신교 운동을 지도하고, 둘째, 왕에게 개신교는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초기 교부들이
가르치고 믿었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후에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다. 그리고 제네바 개신교 운동의 핵심적 인물이 된다. 이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프랑스 개신교 망명자들 500명을 목회하였다. 그 후 다시 제네바 조교지도자들은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로 돌아오도록 간청하게 되고 그곳에서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하는 교회정치 구조를 만든다.
칼빈주의자들의 모임은 스페인이 통치하는 로마 카톨릭 국가인 네델란드에도 생겨났다. 그리고 칼빈주의 교회는 왕이 로마 카톨릭을 선호하는 프랑스에도 생겨났으며, 평신도가
참여하는 교회 정치시스템은 칼빈주의를 영국 청교도 가운데서 성장하게 하였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내에서도
성장하게 하였다.
칼빈의 영향력은 그의 저술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1559년 『기독교 강요』마지막 증보판이 출간되었으며, 칼빈은 목회자 160명을 훈련시켜 프랑스로 보냈다. 선교사로 프랑스로 간 많은 칼빈의
제자들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인구의 삼분의 일이 개신교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프랑스에 핍박이 심해져 교회들이 파괴되었고, 칼빈주의 선교사들이
네델란드와 벨기에, 헝가리, 폴란드로 가게된다. 1555년부터 1558년까지 브라질로 파송한 프랑스 위그노 선교(The French Huguenot Mission)는 유럽 이외의 국가에 보낸 첫 번째 개신교 선교 사역이었다.
나.
프로테스탄트 운동
개신교 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보여주었다. 여러 모양의 교회가 형성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거의 허락하지
않았던 상황화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이런 다양성은 물론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16세기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은 개신교를 비난하였다. “개신교는
참 교회가 아니다, 개신교는 선교적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16세기 개신교가 선교활동에 미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개신교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을 때는 개신교 지역은 군사, 경제가
거의 탈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은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 국가들은 당시 해상권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 유럽에서
힘을 가지고 세계로 나간 나라는 스페인, 포르투칼 뿐이었다. 개신교
국가들인 네델란드와 영국이 해외로 빠져 나간 것은 한참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1534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영국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립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국교의 수장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신학적인 개혁이나 영적인 갱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개인적인 욕망(이혼문제)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 캠브리지에는 성경말씀과 루터의 개혁적인 글들을 읽으며 참된 개혁을 갈망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이후 에드워드가 죽자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딸 매리가
여왕이 되면서 카톨릭을 재건하였고, 매리 여왕은 그녀의 왕권을 행사했던 5년 동안 개신교도 300명을 화형에 처했던 것이다. 5년 동안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유럽대륙으로 도망쳤다. 그 후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등극하여 1603년까지 다스렸는데, 여왕의 관심은 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나라를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은 막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세계 최강의 해상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왕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교회를 더욱 개혁적이고 더욱 성경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청결하고 정화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로 그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청교도는 성경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고 가르치며 교육을 강하게 옹호하는 목회자를
원했다. 청교도들은 영국교회 전체를 개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청교도 운동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된다. 결국 청교도는 분열되고 말았다. 일부는 성공회에 그대로 남고, 다른 사람들은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 후로 회중교단, 침레교, 퀘이크
교도들이 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타계한 후 스코트랜드 출신 제임스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카톨릭 신자였지만 그는 장로교인으로 성장하였다. 성공회에 빠르게 적응하였다. 그는 “장로교가 군주정치에 동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과 동의하는 것과 같다” 라고 하면서 왕은 교회정치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찰스 2세 이후 청교도는 다시
핍박을 받게되는데, 영국은 청교도들에게 가혹하게 했으며,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일부 추방된 청교도들이 먼저 네델란드로 갔으며, 그
후 뉴잉글랜드(오늘날 미국)로 갔다. 그들 중 일부는 선교사였으며, 1631년 존 엘리어트가 메사추세츠에
도착하여 알곤퀸 인디언에게 전도했다고 한다. 청교도 신학은 초기 북미 선교운동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631년 존 엘리어트는 메사추세츠에 도착하여 록스버리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알곤킨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사역을 했다.
(2) 개신교 선교단체 등
개신교 선교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위리엄 캐리라는 사람이다. 캐리 이전에도 여러 선교활동이 있었지만 그는 선교단체를 조직해서 해외 선교하는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캐리의 개념은 선교사로 선교지로 떠난 사람들만 선교에 헌신된 선교단체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남아 선교사를
후원하는 사람들까지도 선교단체에 포함시키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캐리의 선교단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으며, 새로운 출발이었다. 1792년 침례교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후원으로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침례교 해외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최초의 헌금은 13파운드 10실링 6펜스로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65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동인도회사는 아시아권에서 이루어지는 선교활동에 아주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캐리는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야했는데, 덴마크 식민지였던 “세람포르(Serampore)로
갔다. 1804년 캐리와 동료선교사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였으며, 사역영역은
엄청났다고 한다. 1810년 회심자는 300명으로 늘어났으며, 캐리는 영국, 스코틀랜드, 유럽대륙, 북미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선교의 자극을 주었으며, 선교단체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
영국 선교단체
1795년 장로교, 회중교단, 일부 복음주의 성공회가 연합하여 런던 선교회를 만들었다. 런던 선교회는 로버트 마펫과 리빙스턴을 아프리카로 파송했으며, 로버트
모리슨을 중국으로, 존 윌리엄스를 남태평양으로 파송했다. 다음
해 스코틀랜드인 선교회가 에딘버러와 글라스고에서 생겨났다. 이들 선교회는 교단이 발기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1799년에는
“초교파쪽복음선교회”(Interdenominational Religious Tract Society)가
조직되었으며, 1804년에는 영국성서공회와 외국성서공회가 조직되었고, 1813년 워슬리 교파도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나.
유럽 및 미국대륙 선교단체
1796년 네델란드, 1815년 스위스 바젤, 1824년 베를린에서 선교단체가 조직되었고, 노르웨이는 루터교 배경을 가진 3개의 선교단체가 있었다. 그 가운데 기성교단에서 후원하여 생긴 선교단체는 없었다. 모든 선교
단체들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기성교단의 변두리에서 평신도 주도로 세워진 선교단체들이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마지막 3분기까지, 교단 선교부가 선교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학생 선교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미국 선교부가 조직되었다. 미국
해외선교위원회는 학생 선교운동을 시발로 하였지만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목사들이 조직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몰아친 교단주의 물결에 따라 미국에 있던 거의 모든 선교단체들은 교단의 행정적 지원과 후원으로
운영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교단 중심의 선교부 체제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남침례 교단과
하나님의 성회가 아주 강한 교단 선교부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복음주의 교단들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주류교단, 즉 개신교 종교개혁, 17세기나 18세기 부흥운동을 통하여 탄생했던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고 감리교 등의 선교활동은 급속히 감소하였다. 20세기
초에는 거의 미국 선교사 전체 숫자의 75%가 주류 교단 선교부 소속이었다. 1920년대에는 미국에 선교사가 1만 3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교단 소속이 11,000명이었다. 북미에서는 남침례교가 성장하였다. 하나님의 성회, 그리고 다른 복음주의 교단들도 성장하였다. 초교파 선교단체인 예수전도단(YWAM), 오엠 국제선교회(OM),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BT), 파이오니어 선교회(Pioneers), 프론티어스(Frontiers) 그리고 수많은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도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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