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코로나 시대의 기독교 상황

 

24.코로나 시대의 기독교 상황

 

(1) 재난의 시대에 대한 신학적 성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창궐하더니 그 다음 한국에서 창궐하였고, 지금은 이탈리아, 이란, 미국, 일본 등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결국 대유행(pandemic)을 선언하였다. 이 질병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여러 방역 조치들 때문에 각 가정과 개인들 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기업체들, 개인사업자들 모두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교회도 공예배를 중단하거나 축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재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재난 상황에 대하여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재난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세계를 덮치는 이러한 재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재난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까?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오래된 신정론(theodicy)적 질문은 이렇게 묻는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물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1:4, 10, 12, 18, 21, 25, 31).

전통적인 신학은 선하게 창조하신 피조물이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타락하여 악이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개혁신학 전통은 주권적이고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만, 동시에 제2원인들(피조물들 사이의 인과관계에서 원인에 해당하는 것들)의 자유와 우연성도 인정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5.2.) 그러나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을 따라 그러한 것들도 그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5.4.)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종말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중간기적 삶을 사는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목도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기쁨과 생명을 맛보고 누리면서, 또한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완성을 희망 가운데 바라본다.

. 재난과 인간의 책임

일반적으로 재난이나 악 혹은 고통에 대하여 논할 때, 우리는 종종 악을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도덕적 악은 인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악으로서 잔인하고 불의하며 악하고 잘못된 생각과 행위이다. 자연적 악은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악으로서 지진, 화산폭발, 폭풍, 가뭄, 홍수 등을 뜻한다.

그런데 자연적 악이나 도덕적 악으로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기술문명의 발전 때문에 야기되는 재난 혹은 악이다. 필자는 이것을 기술문명적 악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최근의 '지구가열로 나타나는 초대형 태풍들, 가뭄, 대홍수, 폭염, 폭설 등이 포함된다.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서 지구가열이 이루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예상하지 못했던 기후위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형 화학공장의 사고, 교통사고, 항공사고, 해난사고,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혹은 방사능 누출 사고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재난들에 대하여 1차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기술문명을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일들도 많다. 예를 들어, 원전 사고의 경우, 1차적 책임은 원전 관계자들이겠지만, 원전을 발전수단으로 채택한 국가 전체와 그것이 생산한 전기의 유익을 향유하던 모든 사람들도 책임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재난이 자연적 재난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인간의 기술문명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그런 재난을 일으키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적 악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구별하는 이유는 이러한 악이 겉모습은 경우에 따라, 자연악 혹은 도덕적 악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책임은 몇몇 특정인만이 아니라, 어떤 국가공동체 혹은 인류공동체 전체에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악을 자연악으로만 여기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할 것이요, 도덕악으로 치부하면, 몇몇 특정인들에게만 책임을 돌린 채 근본적인 문제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문명적 재난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인 책임 의식을 느끼고 함께 돌이키고(회개하고), 함께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어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큰 재난, 혹은 인류의 멸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는 인류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질병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질병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요즈음 창궐하는 새로운 질병들이 본래 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는 없고 야생동물에게 있었는데, 어떤 변이과정과 중간 숙주를 거쳐 사람에게도 전파된 것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것은 인간이 그만큼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지구가열을 초래하여, 야생동물의 세계를 침범함으로써 인간에게 옮겨온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자연환경, 아니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함부로 파괴하고 착취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도 회개하며 기도해야 하겠다.

 

. 재난은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가?

대재난을 만날 때, 특히 기술문명적 대재난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징벌 혹은 심판인가? 이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이다. 성경은 지진, 기근, 가뭄, 메뚜기, 전염병 등의 대재난이 하나님의 징벌로 주어지는 사례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출애굽 때에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그렇게 이해되었으며 (7:4),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드린 기도의 내용도 그러하였으며 (왕상8:35-40), 우상숭배와 불의하게 힘없는 이들을 압제하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예언자들의 경고가 역시 그러하였다 (24:1-6, 4:23-26, 8:1-10).

사실, 종교인들의 이런 식의 해석과 반응은 고금동서에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도 질병이나 재난이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5:14).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그가 장애인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9:2-3).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난과 죄를 관련지으실 때,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할 부분이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들이 재난을 당했을 때, 피해자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재난을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셨다. 우리는 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도덕적 악과 기술문명적 악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1-5)

아마도 갈리리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던 날, 성전 구역에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덕적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피해 당사자들의 죄의 문제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점을 그들의 죄가 아니라, 질문한 사람들의 죄의 문제로 옮겨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갈릴리 사람이었지만, 가해자인 로마 총독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보편적인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 사건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삶을 개혁하라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예수님은 질문자들이 말하지 않은 다른 경우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그것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다. 당시에 무슨 지진 같은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자연악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망대를 허물었다는 이야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도덕적 악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것은 망대의 부실공사가 초래한 일종의 기술문명적 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하여서도 앞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살해한 도덕적 악에 관한 것과 동일한 태도를 취하신다. 역시 피해자들의 죄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시지만, 문제의 초점을 질문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죄의 문제로 옮겨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장로회신학대학교 현요한 교수 논문 중 일부  2020.03.12)

 

. 코로나 이후 교회의 상황

코로나19 이후에 교회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당에서 예배하기 어려워지면서 많은 교회들이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로 대체하였는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61.1%의 교회가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했고, 현장 예배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는 8.6%, 현장 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동시에 한 경우는 15.6%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절반 정도(52.2%)가 출석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출석 교회에 직접 가서 예배한 경우 13.6%, 현장 예배를 하는 교회에 가서 예배한 경우 0.7%로 현장 예배 비율이 14.3%로 나타났다. 한편, 가정 예배를 한 경우는 13.2%, 방송 예배를 한 경우는 4.0%로 나타났으며, 아예 예배를 하지 않은 경우는 13.0%로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주일예배가 이전과 다르게 다양한 형태가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예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어느 정도 만족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이 했던 온라인·방송·가정 예배와 현장 예배를 비교해서 '현장 예배보다 만족하지 못했다' 53.7%, '현장 예배와 비슷하다' 37.0%, '현장 예배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9.3%, 절반 이상이 현장 예배가 더 낫다는 평가를 하고 있는데, 46.3%의 응답자는 온라인
방송가정 예배가 현장 예배에 못지않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일성수에 대해서 '온라인 예배 또는 가정 예배로도 대체할 수 있다' 54.6%, '주일성수 개념에서 주일예배는 반드시 교회에서 해야 한다' 40.7%로 온라인 예배 대체 가능성이 크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코로나19 이후에도 현장 예배를 고수하기보다 다양한 대체 방법에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현장 예배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헌금도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일부에서는 현장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헌금이 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3명 중 1명 정도(33.6%) '계좌 이체로 헌금했다'고 응답했으며, 35.7% '별도로 모아 놓고 있다가 나중에 교회 갈 때 한꺼번에 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8%는 아무 계획 없이 '교회에 가면 헌금하겠다'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코로나19 사태로 헌금이 다소 줄 것으로 예상되는데 앞으로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교회 재정도 매우 어려워질 우려가 크다. 따라서 교회는 이전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고 성도들이 관행이나 형식보다 예배와 헌금의 본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정재영교수 [출처: 뉴스앤조이] 2020.5.8)

(2) 코로나19에 대한 성경적 대응

코로나19는 우리의 관심을 교회 건물에서 교인들의 삶으로 돌려준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이번 기회를 회개의 기회로 삼고 성도님들과 함께 교회의 죄와 민족의 죄를 회개하자는 많은 교회 지도자의 글을 읽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내용은 “성전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은 다하지 않은 교회”에 대한 회개다. 이는 성경적인 태도이자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이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제사는 거창하게 드리면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를 돌보지 않는 신앙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1-17).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지금, 이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더욱더 가슴 치는 회개를 하게 한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시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라고 큰 소리로 한번 꾸짖으시고(마가복음 11:17), 그 화려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 예언하셨다(마가복음 13:2). 그리고 그 말씀은 주 후 70년에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성전이 무너진 것이 예배가 끝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전 제사가 그치게 되자 사람들은 말씀에 더 집중하였고,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실천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게 되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단번에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가난한 백성들이 제물을 사서 드리느라 애쓰는 일을 더는 필요없게 하셨습니다. 은혜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완전케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성전이 없어진 자리에 새롭게 사람들을 얽어매는 율법이 생겼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많은 부분은 안식일 율법, 정결예법, 부정한 이들에 대한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여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일이었고, 사도 바울도 율법이 아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쏟았다. 이제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를 출석하지 못하는 시기에 우리들이 할 일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의 해석을 사랑으로 완전케 하는 것이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등의 좋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적 부담감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의 전통으로 바뀔 수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후, 주일날 여러 사정으로 출석하지 못했던 분들이 자유롭게 본인이 예배 드릴 수 있는 시간에 접속해서 예배를 드린다. 새벽에 여러 제약으로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던 분들이 녹음된 예배를 새벽에 드린다. 아이들 때문에 소그룹에 오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소그룹으로 모이고, 어른들 잔소리와 눈치에 교회를 오기 꺼리던 젊은이들도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헌금 바구니가 돌아갈 때 남의 눈치를 보며 헌금하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온라인 헌금을 한다. 이처럼 여러 예배 외적인 요소를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예배에만 집중하는 새로운 기회가 생긴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질병에 대응하는 주된 방법은 환자의 격리였다. 예를 들면,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레위기 13:2-5)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격리된 이들이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치유하셨다.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나병 환자들을 만져 깨끗하게 하신 후 공동체로 돌려보내시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혈루증 앓던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지고 병이 나은 것을 믿음의 행동으로 칭찬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병든 친구를 위해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모임에 들어온 것을 보시고는 그 행동으로 표현된 믿음을 칭찬해 주신다. 예수님은 이처럼 몸의 질병보다 사회적 격리를 더 안타까워하셨다.

예수님은 몸만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코로나19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마태복음 10:28).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의미합니다. 결국 코로나19 때문에 격리된 이들이 외롭지 않게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며, 영광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이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온라인으로 소그룹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여러 이유로 교회에서 차별을 당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고 그가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은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시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그것도 안식일에 뜨게 해주셨다. , 교회가 지역 사회의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교회 성장 제일주의나 교회 안에서의 행사에만 집중했던 것을 회개하는 기회로 삼고, 일상생활 속에서 드리는 예배나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무시했던 것을 회개하는 기회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적으로 해석해서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사람과 나와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나누었던 율법적인 태도를 회개하고, 모든 이가 접속하여 드릴 수 있는 예배를 통해, 옷차림, 외모, 생활 수준, 성적 정체성 등 예배 외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했던 이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교회가 새롭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질병을 계기로 율법의 해석에 새로운 눈을 뜨는 기회를 얻게 되면, 이번 일로 돌아가신 모든 분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와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고 서로서로를 돌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코로나19 질병에 대처하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교회와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교회를 개혁하고, 율법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넘어서서, 나와 다른 이웃들과의 관계를 가꾸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성호 목사(콩코드 연합감리교회, Concord, CA) 2020 4 21일 연합감리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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